폭은 좁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수요를 겨냥해 미술 전문 출판사 아트북프레스를 차린 독립 큐레이터 출신의 조숙현(38)씨가 첫 책 ‘웨이즈 오브 큐레이팅-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터 되기’를 냈다. 2018년 말 출판사 등록을 하고 1년여 만에 거둔 첫 과실이다.
조씨는 1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작가도, 전시도 모두 중요하다. 최종 남는 것은 전시를 기록하는 책”이라며 “책에서는 저자와 독자가 일 대 일로 만난다.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그런 매력에 베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미술책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주변에서 실패사례를 봐와서 손해는 안 났으면 싶었다. 제작비를 절감하는 방안을 많이 연구했다”고 강조했다. 밀레니얼 세대인 그는 무게를 잡지 않는다. 사무실을 두지 않고 자택과 카페, 공유사무실 어디든 사무실로 썼다. 이번에 낸 책은 그림 하나 없이 글자만 빽빽하다. 여백은 싹둑 자른 느낌이 들 정도로 최소화했다.
왜 오브리스트였을까.
“책의 성공은 결국 텍스트의 힘에 달려 있어요. 텍스트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큐레이터 출신이면서 글에 힘이 있어요.”
스위스 태생의 오브리스트는 2009년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매년 선정하는 세게 미술계 파워 인물 100인 중 큐레이터로 최초로 1위에 올랐다. 20대부터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베를린비엔날레, 리옹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등 중요한 현대미술제를 기획했다. 현재는 영국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부엌 냉장고에 작품을 전시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책의 원작은 그가 2015년에 쓴 에세이다. 국내에는 ‘큐레이팅의 역사’(2013, 미진사), ‘아이웨이웨이: 육성으로 듣는 그의 삶 예술세계’(2011, 미메시스) 등 저서가 일부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그가 큐레이터로 왜 유명해졌는지를 삶의 역정과 철학, 태도 등 그의 육성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은 처음이다. 그가 매일 아침 15분 동안 철학자 에두아르 글리상의 글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얘기, 관제 살롱전에서 탈락하자 임시천막을 치고 개인전을 연 귀스타브 쿠르베를 일종의 큐레이터로 보는 관점, ‘전시는 항상 게임의 새로운 규칙을 발명해야 한다’는 철학 등 흥미진진한 지점들이 갈피마다 튀어나온다. 문장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통찰력이 번득여 흡인력이 있다.
번역은 미술기획자 양지윤(43)씨가 맡았다. 미술 분야를 잘 모르는 전문 번역가들이 하는 오역의 실수를 봐온 터였기 때문이다. 미술 용어로 굳혀진 ‘오브제’를 ‘사물’로 번역해 문맥을 흐리게 한 것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양씨는 미국 뉴욕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학사학위를,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대안공간 루프 기획자로 일한다. 번역은 깔끔하다. 책 디자인은 민준기 작가가 맡았고 표지 그림은 장철원 작가의 작품을 실었다.
이번 책은 유통 방식도 흥미롭다. 지난달 중순 출간 이후 3주간 크라우드 펀딩(선주문)으로 책을 판매했다. 일반 온·오프라인 서점에는 이달 초부터 깔렸다. 조씨는 “800권을 판매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구조로 짰는데, 벌써 거의 다 팔렸다”며 “누군가는 이 책이 꼭 필요했던 것”이라며 웃었다.
두 번째 책으로는 이불에 드로잉을 하는 허찬미 작가의 수제 아트북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모마)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를 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하지만 책의 형태로 미술관 서점에 들어가는 것은 그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 같더라. 그렇게 책으로 세계무대에 한국 작가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