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중독에 빠진 대한민국…“공정한 시험은 없다”

입력 2020-03-11 15:54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한 한 수험생이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시험 볼 준비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의 ‘괴짜경제학’에는 흥미로운 퀴즈가 등장한다. 아이의 성적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변인을 가리는 문제로, 보기 일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다. ②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 ③아이가 출생 당시 저체중이었다. ④집에 책이 많다. ⑤이혼이나 별거를 하지 않은 가족에서 자라났다. ⑥최근에 주변 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이사했다. ⑦유치원 가기 전까지 엄마가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⑧부모가 아이를 박물관에 자주 데리고 다닌다. ⑨아이가 TV를 많이 본다. ⑩부모가 거의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정답부터 공개하자면 ①~④번이다. 나머지 ⑤~⑩번은 자녀의 성적 향상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얼마간 통념에 반하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연구만 놓고 보면, 가령 강남 8학군 같은 교육 환경보다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즉,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고, 그래서 집에 책이 가득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또래 친구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다. 아이들 사이에선 어떤 부모를 두었느냐에 따라 진작부터 극복하기 힘든 차이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공정한 시험은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대입 제도와 관련해 지필시험(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향력을 끌어올리자는 정시 확대 주장이 거세게 일었다. 정시 확대가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필시험은 무늬만 공정한 시험일 때가 많다. ‘괴짜경제학’에 담긴 내용처럼 아이들 사이에선 출생 당시부터 성적 향상에 영향을 끼치는 격차가 존재한다. 학창 시절에 과외를 받고, 선행학습 코스를 밟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는 시험에 유리하다. 수능은 모든 응시생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제를, 동일한 시간에 푸는 시험이다. 조건이 같으니 공정한 경쟁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과연 그런가. 최근 출간된 ‘시험인간’에 담긴 주장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시험 전날까지 어떤 교육,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거기에서 어떤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나?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수능은 공정하다고 믿으면, 그 점수에 따라서 갈라지는 인생의 길,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모두 공정한 것으로 믿게 된다.”



‘시험인간’에는 이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주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런저런 반박이 가능한 지점이 수두룩하고, 저자들이 내놓는 대안도 얼마간 급진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대한민국이 어쩌다 시험 공화국으로 전락했는지 살피면서 시작한다. 저자들은 각종 통계와 인터뷰, 논문과 언론 보도를 깁고 엮어서 한국인들이 영유아기부터 뛰어들어야 하는 시험의 세계와, 취업준비생이 마주하는 팍팍한 시험 전쟁의 실상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물론 저자들이 시험의 효용을 무작정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른바 진학이나 채용 과정에서 당락을 결정짓는 ‘고부담 시험(high-stakes exam)’의 파워다. 제목인 ‘시험인간’은 “선발과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시험에 적응한 인간형”을 가리킨다. 저자들은 “입시와 취업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거의 대부분은 시험인간”이라고 규정해놓았다.

한국인은 개인이 가진 저마다의 능력을 점수로 바꿔놓는 “시험의 명쾌한 환산 능력”을 맹신한다. 반대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 예컨대 시험에만 올인하게 만드는 대입제도를 개선하려는 작업이 벌어지면 “그 어떤 시도도 상품으로 전환해버리는 사교육 시장” 탓에 물거품이 될 때가 허다하다. 문제는 ‘시험인간’이 대입 시장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업 시장에서도 시험의 파워는 막강하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공시생’은 현재 38만~46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2018년 기준 취업 준비생 수가 62만6000명 수준이었으니 ‘취준생’ 10명 중 6명은 공무원 시험에 청춘을 걸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좋은 시험’을 위하여

두 저자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재직하고 있다. 김기헌은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장근영은 연세대 심리학과를 나왔다. ‘시험인간’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합작품인 셈이다. 특히 심리학의 렌즈로 한국인이 왜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살핀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책에는 “시험 중독”의 과정이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해놓았다. ①시험에 쏟은 시간과 비용 탓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매몰 비용의 오류”. ②어떤 대상에 집중하면 시야가 좁아져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는 “터널 비전”. ③다른 구성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거대 집단에 속하기 위해 의문을 뭉개버리는 “집단사고”. 그렇다면 ‘시험인간’이 가득한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띨까. 우선 서열주의가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 다수 시민은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느낀다. 인간 평가의 잣대는 획일화된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불신한다. “갑질과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사태도 벌어진다.

저자들이 “탈(脫) 시험인간”을 꿈꾸며 내놓은 처방전은 정밀하게 설계돼 있다. “고등학교에서 비교과 수업을 최소 30% 이상 늘리자” “수능을 절대평가를 전환하자” “경쟁력 있는 국립대학을 키우자” “사립대 재정 지원을 대폭 축소하자”…. 이들 주장에 어떤 반론이 나올지는 예상 가능하다. 핵심은 시험이 왜 존재하는지 묻는 것에서 진정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시험인간’은 시험의 가치와 역할을 부정하는 책이 아니다. 두 저자는 “시험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인문학 도구 중 하나”라고 치켜세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건 “좋은 시험”이다.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며,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의 경우 평가자의 전문성과 헌신이 뒷받침되는 시험이 “좋은 시험”이다.

학교의 수업 분위기를 큰 틀에서 바꿔놓자는 주장도 인상적이다. 두 저자는 “문제를 푸는 교육을 문제를 내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적 해방의 출발은 정답이 아니라 물음에 있다. 학생들 스스로 물음을 만들고, 새로운 물음에 직면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물음으로써 앎과 모름의 경계를 스스로 명확히 하면서, 함께 앎의 경계를 넓혀갈 수 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