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의 Fn터치]사우디가 당긴 오일전쟁 방아쇠, 성공할까?

입력 2020-03-09 16:18 수정 2020-03-09 16:22
감산정책에서 시장점유율 정책으로 회귀
러시아와 함께 미국을 겨냥했지만 부작용 우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공포가 지구촌 전체로 확산되는 와중에 최대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오일전쟁 방아쇠까지 당겼다.
코로나19에 따른 원유시장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14개국으로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연장 합의를 러시아가 거부한데 대해 사우디가 다음 달부터 증산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9일 브렌트유는 국제원유시장에서 30%나 폭락했다.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도 27% 떨어졌다. 이 같은 가격 변동 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최대치다.
지난해 12월 11일 알리바바를 제치고 IPO사상 최대 공모금액인 256억 달러를 달성하며 상장 당일 상한가를 기록한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의 주가는 사우디의 증산 소식에 8일 전거래일보다 9% 떨어진 30리얄로 마감했다. 3개월 만에 상장가(32리얄)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사우디는 하필 코로나19 공포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세계경제에 부담을 주는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그 이면엔 최근 5년간 사우디의 석유감산 정책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 또 그동안 전통적 외교안보 동맹국으로 통하던 미국에 대한 서운함도 한몫하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 즉 OPEC는 국제시장에 유통하는 원유가격을 통제하는 카르텔 조직이다. 국제 경제 상황에 따라 석유 생산량을 조절함으로써 가격을 유지해오는 ‘담합’행위를 해왔다. 사우디는 14개국으로 이뤄진 이 조직의 맹주로 1980년대 이란과의 석유전쟁 이후 이른바 ‘마켓셰어’ 정책(시장점유율 최우선 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5년 전부터 이런 전통적인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고 감산정책을 펼쳐왔지만 원유가격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 그동안 석유시장이 중동산유국이 쥐락펴락하는 공급정책에 좌우됐다면 이제는 수요에 의해 공급이 끌려다니는 상황으로 반전된 것이 근본원인이다. 여기에다 전기차 개발 속도가 빨라지는 등 석유 의존도도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산유국의 위기를 부채질하는 형국이다.

사우디는 이런 불리한 환경에서 전통의 산유국 맹주답게 총대를 메고 OPEC 감산량의 많은 부분을 책임졌다. 그러는 동안 2016년 이 후 공공연히 증산을 선포해 온 미국의 셰일 업체들이 사우디로부터 시장 점유량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기 시작해 사우디의 하루 생산량은 1000만 배럴 밑으로 떨어진 반면 미국의 생산량은 1300만 배럴로 역전됐다. 사우디에 따라붙던 세계 최대산유국이란 타이틀이 이미 미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DB금융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OPEC와 비OPEC 산유국 즉 OPEC+ 국가들은 2018년 10월 말 감산 합의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지지부진해지자 지난해 12월 총회를 열어 올 1분기까지 2018년 10월 기준 산유량 대비 하루 120만 배럴(OPEC는 80만 배럴, 러시아 등 비OPEC는 40만배럴)에서 50만 배럴을 추가 감산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사우디는 자발적으로 40만 배럴을 더 감산하기로 했다. 이를 감안하면 OPEC+의 감산량은 210만 배럴까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11월 기준으로 이미 116만 배럴을 감산했기 때문에 추가 감산효과는 54만 배럴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 문제는 그간 사우디의 자발적인 감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원국 간에는 이미 감산 형평성으로 잡음이 일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2018년 10월 당초 하루 감산 합의량 32만2000배럴보다 1.5배 많은 78만9000배럴을 줄였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감산량 5만3000배럴을 감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3만3000 배럴을 늘리는 등 회원국간 불협화음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OPEC 국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일 3월까지인 감산정책을 연장하기로 합의했지만 비OPEC국가를 대표하는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자 드디어 참았던 사우디도 4월부터 증산으로 석유정책을 번복하고 나선 것이다. 아람코는 이에따라 하루 원유생산액을 977만배럴에서 1000만배럴 이상으로 늘릴 것으로 보인다. 감산을 단행해도 낮은 유가로 인해 손실이 커지는 마당인데 차리리 생산을 늘리는 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가장 유리한 전략이라고 깨달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간 100%를 밑돌던 전세계 원유의 수요 대비 공급 밸런스는 지난해 3분기와 4분기 각각 101.2%와 100.7%로 100%를 넘었으나 올 상반기 비수기로 접어들면서 원유 수요가 감소하는데다 최근에 터진 코로나19로 수요가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우디의 정책은 겉으로 보면 시장점유율을 늘림으로써 러시아를 경쟁상대국에서 탈락 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1980년대 이라크를 상대로 했던 전략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우디 행동의 근저에는 미국에 대한 견제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러시아의 감산 합의 거부도 마찬가지다.(이번 오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미 충분한 실탄을 장전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어찌보면 사우디와 러시아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미국을 두 나라의 공동의 적으로 삼은 것일 수도 있다. (석유 앞에서는 어제의 우방이 내일의 적국으로 돌변하는 역사적인 한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를 보면 이런 정황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 러시아가 추가 감산에 동의하지 않은 건 감산에 들어갈 경우 미국 석유회사들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는 것이다. FT는 빈 합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들을 인용해 "러시아가 경쟁국인 미국의 셰일산업과 미국 경제에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현재 신규 유정 기준 손익분기점(BEP)은 40달러 선으로 추정된다. 골드만 삭스는 사우디발 증산 쇼크로 인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20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9일 아시아원유시장이 문을 열자마자 브렌트유가 배럴당 45달러에서 31달러로 하락한 점을 감안하면 증산으로 유가가 급락할 경우 미국의 석유산업도 큰 타격을 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의 하이일드 채권 시장에서 미국의 셰일오일 업자 등 에너지 기업들이 발행하는 정크본드는 11%나 차지한다. 지난주 금요일 사우디의 증산 발표 여파로 이들 기업의 채권 가산금리가 11%까지 치솟은 것은 이들 기업이 신용경색에 빠질 우려가 점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두려워하는 유동성 위기가 사우디와 러시아가 당긴 오일증산 방아쇠에서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치킨게임의 승자가 누가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러시아는 저유가를 기반으로 예산을 편성했다는 분석도 나오는 만큼 유가 하락에 덜 민감하다는 의견도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유가가 현재 51달러 밑으로 내려간 상황이지만 지난 2년간 쓰다남은 예산이 있어 유가가 40달러 선에 접근하더라도 러시아는 정부지출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사우디다. 원유 수출을 주업으로 삼는 중동국가들은 원유수출 단가가 재정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재정균형유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사우디의 재정균형유가는 60~70달러선으로 추정되고 있어 유가가 폭락할 경우 사우디가 어느정도까지 버틸 수 있느냐가 이번 치킨게임 승부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