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도밍고 놓지 못하는 유럽 오페라계

입력 2020-03-09 07:05
지난해 10월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가 러시아 모스카바에서 공연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오페라노조(AGMA)가 도밍고가 최소 27명의 여성에 대해 부적절한 성추행을 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후에도 유럽 오페라계가 도밍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미투 불모지’로 불리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서유럽 오페라계는 대부분 도밍고를 무대에 세울 계획이다.

미국오페라노조(AGMA)는 지난달 24일 약 6개월간의 조사 끝에 도밍고에게 제기된 성추행 의혹이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8월 AP통신의 보도 이후 줄곧 의혹을 부인해 왔던 도밍고는 다음날 “내가 여성들에게 입힌 상처를 미안하게 여긴다는 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도밍고가 입막음을 위해 AGMA에 50만 달러(약 6억800만원)를 기부 형식으로 주려 했다는 사실을 뉴욕타임즈가 보도하면서 여론은 한층 악화됐다.

스페인 문화부는 다음날인 26일 5월 14~15일 마드리드의 국립 사르수엘라 극장에서 열리는 ‘루이사 페르난다’에 플라시도 도밍고의 출연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성추행 의혹 이후 도밍고의 출연을 취소했던 미국과 달리 무죄 추정원칙을 적용해 도밍고의 출연을 막지 않았던 유럽 공연계에서 처음으로 나온 퇴출 조치여서 큰 파장이 일었었다. 무엇보다 스페인은 도밍고의 조국으로 그동안 도밍고를 감싸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스페인 문화부의 발표 이후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을 비롯해 우베다 음악협회, 발렌시아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차례차례 도밍고의 출연이 취소됐다.

도밍고는 스페인 문화부의 발표 다음날 성추행 의혹을 다시 부인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나의 앞선 사과문이 만들어낸 잘못된 인상을 바로잡기 위해 추가로 성명을 내야 할 것 같다”면서 “나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불편했거나 고통받은 모든 동료에 대한 나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공격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누구의 경력을 해칠 만한 행동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 빈축을 샀다.

스페인 문화부의 발표 이후 미국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WNO)가 지난 2일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서 도밍고의 이름을 지우기로 결정했고, 영국 로열오페라는 6일 도밍고가 7월에 예정됐던 ‘돈 카를로’ 공연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두 오페라는 미투 운동이 강력했고 성추행 문제에 엄격한 영·미권으로 다른 유럽의 오페라극장과 페스티벌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 세계 오페라계의 핵심국가들은 AGMA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親) 도밍고’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도밍고는 오는 22, 26일과 다음 달 2일 독일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시몬 보카네그라’에 출연한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는 “스페인 문화부 발표 이후 다른 오페라극장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냈다. 6월 ‘라 트라비아타’와 ‘나부코’ 등 2편에 도밍고가 출연하는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뮌헨 슈타츠오퍼는 7월 27일, 30일 ‘나부코’에 도밍고가 예정대로 출연한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역시 4월 23일, 26일 ‘라 트라비아타’를 계획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은 5월 ‘백야 축제’에 도밍고를 새롭게 캐스팅 했다고 발표했다.

‘미투의 불모지’로 불리는 러시아는 그렇다치더라도 인권의식이 높은 서유럽에서 도밍고의 퇴출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용숙 오페라평론가는 “법률적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유럽 공연계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면서 “오페라하우스의 결정권자 상당수가 도밍고와 막역하다. 이들은 예술가에겐 다른 도덕적 기준이 적용됐던 구시대의 인물들이라 변화에 더디다”고 지적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