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규의 히든 히어로] 61세 노인이 던진 폭탄, 식민지 청년을 깨우다

입력 2020-03-07 08:00
을씨년스러운 어느 하루,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됐다. 그리고 이어진 애국지사들의 연이은 자결 소식. 암울했던 나라의 명운은 더욱 어두워졌고 결국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 당한다. 당시 군의관이었던 한의사들은 각 마을로 스며들어 한약방을 차렸고, 나머지는 독립군이 되었다. 당시 민중을 지키고, 자신의 위치에서 애국을 실천했던 숨겨진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을 넘나들며 약초를 캐고,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며, 자신의 상점을 비밀연락망 연통제로 활용했고, 나아가 실제 독립군에 참여해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독립운동사는 사건 위주의 역사서 편찬으로 인해 이러한 인물과 직업군으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3.1만세운동 101주년을 기념해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강우규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요시찰인물 명부).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 역. 조선 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누군가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의 목숨을 겨냥했고 약 36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약 보름 뒤 검거된 폭탄 투척자는 놀랍게도 61세의 노인이었는데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폭탄을 던진 것일까?

강우규 의사.

강우규는 우리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인술(仁術)을 베풀면서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렇다. 그는 한의사였다. 30세가 되던 해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했고 잡화상을 경영했는데 수완이 좋아 연이은 사업에 성공했다. 그때 국권회복운동과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함경도 일대를 다니던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운명처럼 만났다. 이를 기반으로 강우규는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새로운 학문을 전파하고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강우규 의거 당시 남대문역 인파.

강우규의 계몽운동 시작은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감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결국 국운은 계속 기울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지역으로 향했다.

100년 전 조선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49세, 47세였다. 따라서 당시 50대의 나이는 오늘날 70대 중후반에 해당했고 단어 그대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늙고 지쳤어도 정신은 여전히 ‘젊은이’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3•1만세운동 소식이 만주 요하현(饒河縣)에도 퍼지자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강우규는 끊임없이 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아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4일 조선인 동포들(훗날 고려인)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선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동휘 선생의 부친 이승교, 김치보와 박은식 등이 결성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다. ‘노인동맹단’은 46∼70세 남녀로 구성된 매우 특이한 독립운동단체였는데 독립운동 1세대에 해당하는 본인들에게 조국의 운명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어른'들이었다. 명부에 기록돼 있는 회원만 2천여 명으로 학계에서는 1919년 6월 당시 5천 명 정도가 ‘노인동맹단’에 가입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어있는 전체 독립유공자 1만 5천여명 중 33%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1919년 11월).

매일신보 1919년 10월 7일자의 강우규 의사 피체 기사. "투탄 진정범인 강우규 체포"라는 제목으로 의사의 사진과 함께 의사가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왼쪽 사진). 가운데는 매일신보 1920년 2월 27일자에 실린 강우규 의사가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모습, 같은 해 5월 2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선생의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기사(오른쪽).'강우규는 결국 사형'이라는 제목이다.

‘노인동맹단’은 파리 강회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외교적인 활동에 주력했고, 일부 강경파는 노인단 대표를 경성에 파견해 보신각에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19년 5월 노인동맹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일으킨 경성 만세시위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강우규는 ‘노인동맹단’을 대표해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했다. 1919년 7월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매하고, 허형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원산부를 거쳐 경성에 잠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달이 걸렸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 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그가 던진 폭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신임 총독 사이토를 환영 나온 일제 관헌과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당시 중경상을 입은 자들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水野練太郞), 육군소장 무라다(村田信及), 본정(本町) 경찰서장 고무다(小牟田十太郞), 철도관리국장 구보(久保要藏), 철도관리국 운수과장 운또오(安藤又三郞), 이왕직(李王職) 사무관 이원승(李源升), 경기도 순시(巡視) 스에히로(末弘又二郞), 오오사카 아사히신문 특파원 다찌바나(橘香橋), 대판 마이니찌신문 특파원 야마구찌(山口諫男) 등이었다. 이들 중 경기도 순시 스에히로는 9월 11일 사망하였고, 오오사카 아사히신문 경성 특파원 다찌바나는 11월 1일 사망하였다.
1910년경 사이토 마코토 총독.

말이 빗나갔지 사실상 대다수 A급 전범에 필적하는 민족의 원흉들이 상처를 입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육신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그가 입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다. 이때 강우규의 나이 61세, 지금의 80대 중반이었다. 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으며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 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도피 중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높은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9월 17일 수용됐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받고, 교수형 당하기까지 법정에서 자신의 태도를 단 한 번도 굽히지 않고 당당했다. 이것은 기록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역사였다.
마차에서 내려 재판정으로 가는 강우규 의사. 일제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용수를 씌웠다(1920년 4월 14일).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 강우규의 유언

의열투쟁의 본질이 무력을 통해 조국독립의 뜻을 일제와 세계에 전달하려는데 있다면, 강우규의 의거와 그 후의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동포와 민족에게, 그리고 일제와 국제사회에 전해진 메시지는 엄청났다.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라는 점과 당시 강우규가 의거를 결행한 나이(61세)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강우규의 거사 후 수많은 비밀결사대의 창설이 1919년 12월부터 연달아 발생했다. 1920년 초반에만 20여 개가 넘는 의열단체가 만주와 북간도에서 탄생했고 이들의 평균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이러한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노선은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 20대 초반 청년들이 모여 만든 ‘의열단’과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졌다. 강우규는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운 교육자, 한의사,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