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지난 3일 밤 우리 정부를 향해 말폭탄을 쏟아내면서 그 의도와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남북 정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온 김여정은 “저능한 사고” “세 살난 아이들” “겁 먹은 개” 등 원색적인 언어로 청와대를 공격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정부에 쌓아온 불만을 여동생의 입을 빌어 터뜨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여정은 3일 밤 10시30분쯤 본인 명의로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는 제목의 담화를 기습 발표했다. 개인 명의 첫 담화다. 북한이 대미 관련 담화를 발표하는 시간대에 남측을 정조준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다.
담화를 살펴보면 김 위원장이 그동안 우리 정부에 쌓인 불만·분노를 참지 못하고 김여정을 통해 한밤중에 쏟아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4일 “최근 북한의 발사체 발사에 청와대가 우려를 드러낸 게 북한을 자극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합동타격훈련을 축소해 진행하고 대남·대미 비난도 자제했는데, 한국이 ‘강한 우려’를 표하자 불쾌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여정은 담화에서 “나는 남측도 합동군사연습을 꽤 즐기는 편으로 알고 있다”며 “자기들은 군사적으로 준비돼야 하고 우리는 군사훈련을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이런 강도적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누가 정상 상대라고 대해주겠는가”라고 말했다. 홍 실장은 “금강산·개성공단 재개가 요원한 데 가뜩이나 불만이 컸는데, 통상적인 훈련에 유감을 표하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봤다.
김 위원장은 이번 담화가 갖는 의미와 무게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김여정을 활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백두혈통’이자 남북 정상의 가교 역할을 해온 김여정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메시지의 격은 높이고 그 파급력은 최대화했기 때문이다.
김여정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김 위원장 특사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같은 해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도 배석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김 위원장이 당분간 남북 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다는 메시지를 상징성을 가진 김여정을 통해 던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문 대통령과 청와대를 구분해 비난한 만큼 남북 관계 개선의 여지는 남겨놨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박 교수는 “북한이 레드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김여정 담화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에 대한 정부의 기본 입장을 말씀드렸다”며 “그 외에 드릴 말씀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남북, 북‧미 대화가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청와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문가들은 김여정이 직접 담화문을 작성한 것으로 봤다. 문체나 표현에서 기존 북한 당국이 발표해온 담화문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여정이 담화에서 사용한 ‘나는’이라는 1인칭 표현과 ‘몰래몰래’ 같은 표현은 거센 용어가 대다수인 북한의 담화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딱 누구처럼…”이란 시적인 표현도 기존 담화문에선 흔치 않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전반적으로 문체나 표현이 여성스러운 느낌”이라며 “북한도 스피치라이터가 있지만 담화문을 내는 주체가 많이 고치기도 한다. 김여정이 직접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손재호 박세환 이상헌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