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신군부의 ‘시간 정치’, 신자유주의의 서막이었다”

입력 2020-03-04 16:25 수정 2020-03-04 16:28
1981년 치러진 전국체전에서 펼쳐진 대규모 카드 섹션. 당시 전국체전은 TV를 통해 생중계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로 비춰졌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2년 1월 5일, 신문사들이 뿌린 호외에는 야간통행금지제도(통금) 해제 소식이 실려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국무회의에서 전격적으로 통금 해제를 결정했다. 이듬해 그가 내놓은 연두사는 제법 비장한 분위기를 띤다. “통금 해제를 계기로 국민의 질서의식을 새롭게 하고 86년의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모든 분야의 준비가 마침내 본격화되어야 할 때이다. …우리가 만약 그 변화를 우리의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유익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연두사의 행간을 살피면 통금 해제 결정이 국민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나라 밖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였다. 지구촌 잔치를 앞두고 신군부는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이 “정상 국가”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의도가 어쨌든 간에 통금 폐지는 한국 사회를 크게 뒤흔들었다. 통금 해제는 “24시간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예광탄이었다. 사람들은 “미개척지” 같던 심야의 시간을 마주했다. 낮과 밤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국민들의 “시간 의식”은 바뀌었고 “사회적 시간”도 재구성됐다. “80년대 시간성의 변화는, 발전국가 시기였던 1970년대와 민주·소비사회로 지칭되는 90년대와 연결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21세기 성과사회로 나아가게 한 하나의 변곡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를 돌아보다

그렇다면 8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그 시절 등장한 박노해의 시 ‘졸음’을 보자. “선적날짜가 다가오면/ 백리길 천리길도 쉬임 없이 몰아치는/ 강행군이 시작된다/ 어차피 하지 말라 해도/ 올라간 방세를 메꾸려면/ 아파서 밀린 곗돈을 때우려면/ 주 78시간이건, 84시간은 먹어치워야 한다.”

당시에도 근로기준법은 존재했다. 법정근로시간은 1주에 48시간이었다(노사가 합의하면 1주 60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근이 살아가던 노동자들이 “방세를 메꾸려면” “곗돈을 때우려면” 법은 신기루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80년대는 수출량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통금이 해제되자 공장들은 24시간 가동됐다. 2교대, 3교대 근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통금 해제로 국민들이 거머쥔 심야 시간은 침묵이나 휴식의 시간이 아닌 노동의 시간이 되었다. 80년대 유직자(有職者) 노동시간을 보면 83년 6시간 36분이던 것이 87년엔 7시간 40분으로 4년 만에 1시간 4분이나 증가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야간에 보충학습이나 자율학습을 시켰다. 8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의약품을 조사하면 1~3위가 피로회복제다. 사람들은 박카스나 우루사를 마시며 졸음을 쫓았다.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이렇듯 80년대의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그린 거대한 세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이야기가 담긴 기록물 수준의 작품이라면 이 책에 주목할 필욘 없을 것이다. 저자가 내세우는 핵심 키워드는 ‘시간정치’다. 신군부는 국민의 시간을 경제 자원으로 여겼고 통치에도 적극 활용했다. 국민의 일상을 ‘기획’하는 데 활용한 도구는 TV였다. 80년 12월 1일부로 이뤄진 언론 통폐합을 통해 TV는 KBS와 MBC 이원 체제로 재편됐다. 아침방송이 재개됐고 ‘가정고교방송’이 시작됐으며 컬러방송이 자리를 잡았다. TV는 “국민 시계”가 되었다. 아침 뉴스와 저녁 뉴스는 시보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뽀뽀뽀’나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음악만 나와도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국민의 일상은 TV 프로그램 편성에 따라 비슷한 패턴을 띠게 됐다. 정부는 81년부터 ‘국민생활시간조사’도 격년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시간자원”이 24시간 동안 각각 어떻게 쓰이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 밖에도 법정기념일 지정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오갔던 많은 논의나, 국민들에게 “시간주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 서머타임제 논쟁 등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저자는 이들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놓고 국가 기업 국민 등이 벌인 경합을 자세하게 풀어내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수두룩하다. 80년대를 다룬 책이야 차고 넘치지만 ‘시간’이라는 렌즈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복기한 작품은 처음인 듯싶다.



시간의 민주화를 위하여

‘24시간 시대의 탄생’에서 눈여겨봄 직한 포인트는 현재 한국인이 느끼는 ‘시간성’의 뿌리가 80년대에 가닿아 있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통금 해제의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통금 해제로 인한) 시간 이용의 경험과 시간 개념의 변화는 개인을 새로운 성과 주체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이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말미에 등장하는 개념은 “시간의 민주화”인데, 책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시간이 자원이라면 그것의 개발과 생산 못지않게 소비와 분배 역시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시간 부족과 시간 압박을 호소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시간자원의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사회적 시간의 개발과 재구성 과정에서 시간의 민주화가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저자인 김학선은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궁금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외대 한국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그의 첫 책이다.

김학선은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공부를 하면서 ‘시간 빈곤감’을 많이 느꼈다. 자연스럽게 시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사람들이 시간을 주어진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 실체를 곰곰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4시간 시대의 탄생’은 8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쓰게 된 책”이라고 소개했다. 책날개엔 현재 그가 “대한민국의 시간 가속화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점점 더 빨리 흘러가는 대한민국의 시간에 대해 다루겠다는 것이다. 김학선은 전화 인터뷰에서 “사회적 시간에는 권력 관계가 감춰져 있다”고 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