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60)는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영화에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꾸밈없고 생생하며 소박하고도 일상적이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제70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 감독상을 품에 안긴 24번째 작품 ‘도망친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 고유함은 퇴색된 적이 없다.
홍 감독 스스로도 본인에 대해 “작은 세계에서 조그맣게 사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29일(현지시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큰 그림을 그리거나 큰 의도를 갖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작품에 거창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보다 그저 소소하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다는 것이다.
홍 감독은 “영화를 만든 뒤 메시지나 의도가 생길 수 있지만 되도록 사전에 배제하려 하는 편”이라며 “달콤한 사각지대에서 머무르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되도록 큰 의도를 갖고 만드는 유혹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한다”면서 “강한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세부적인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신작 ‘도망친 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두 번의 약속된 만남과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과거 세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는 감희(김민희)의 여정을 그린다. 아직 국내 개봉 전이라 공개된 정보는 한정적이나, 인물 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즉흥적인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특유의 방식 그대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영화제 측은 “‘도망친 여자’는 주인공과 친구들의 만남을 미니멀리즘적으로 묘사해 표면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은 무한한 수의 세계를 암시한다”고 평했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연인 김민희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클레어의 카메라’(이상 2017) ‘풀잎들’(2018) ‘강변호텔’(2019)에 이어 7번째 호흡을 맞췄다.
김민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제68회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둘의 합작을 통해 김민희의 연기와 홍상수의 작품이 동반 성장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홍 감독은 지질한 남성들의 일상, 현대인들의 해프닝을 영화에 담아내 현대사회를 비꼬는 작품들을 계속해 왔는데, 단점이 있다면 여성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데 김민희와 함께 지내면서부터 여성성이 성장했다”며 “이전에는 남자들의 지질함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으로 여성이 등장했었다면, 이후에는 여성들이 본연의 가치를 가진 통쾌한 캐릭터로 탈바꿈했다. 지질한 남성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시선도 더해졌다. ‘도망친 여자’ 역시 여성 주인공이 앞서 나간다는 점에서 그런 경향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고 분석했다.
이번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감독상이 지니는 의미는 상당하다.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온 홍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과 베를린, 베니스영화제를 통틀어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수상 영예를 안은 건 네 번째다. 1998년 ‘강원도의 힘’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특별언급상을, 2010년에는 ‘하하하’가 이 부문 대상을 탔다.
정 평론가는 “그동안 홍 감독이 보여준 작품 세계의 일관성이 결국 평가를 받았다고 봐야 한다”면서 “남성들의 지질한 속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은데, 홍 감독의 영화는 그런 심리를 아주 담백하게 표현해낸다. 그게 가장 매력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지점도 외국 사람들은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므로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이번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에 대해 “홍상수는 건재하다는 걸 보여준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감독 개인사와 관련한 문제 때문에 그가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등과 나란히 거론돼야 하는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기어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는데, 유럽에서는 여전히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짚었다.
윤 평론가는 “홍 감독은 일상적인 장면을 포착해 스크린에서 굉장히 특별하게 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아가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를 블랙 유머로 승화시켜 그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강점이 있다”면서 “특히 홍상수 영화는 캐릭터가 가진 욕망을 전시하곤 하는데, 모든 인간들이 이입할 수 있는 그 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해낸다”고 치켜세웠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