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예사 정규직화는 성과↑” vs “미술관이 박물관 될 것”

입력 2020-03-02 17:09 수정 2020-03-03 11:11
“학예사 정규직화는 직업 안정성을 높여 전시 성과로 이어진다.” “철밥통 공무원이 되면 미술관이 박물관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법인화 전면 백지화 방침에 따라 법인화를 전제로 채용됐던 기형적인 전문임기제(계약직)를 정규직화하기로 하고 해당 인력 39명에 대한 순차적인 공모절차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술계 일각에서 획일적인 정규직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보완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 국민일보는 2일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 공·사립미술관장, 미술기획자, 학자, 작가 등 다방면의 미술계 인사 15명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일괄 정규직화에 대한 찬성은 5명, 반대(법인화 지지 포함)가 8명, 기타가 2명으로 조사됐다. 찬반 상관없이 모두 보완책을 요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경. 문재인정부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가 전면 백지화됨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은 법인화를 전제로 채용됐던 전문임기제 인력 39명에 대한 정규직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찬성 입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들에게서 대부분 나왔다. A씨는 “1∼2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기존 체제는 연구·수집과 같은 (잘 드러나지 않는) 미술관 고유 업무를 등한시하게 하고, 전시에서도 '중장기' 계획 수립을 불가능하게 한다”며 “이직률도 높아서 인재 양성의 관점에서도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진단했다.

B씨도 “일시에 공채로 전환되는 것에 대해선 우려가 있지만, 정규직 전환 자체는 환영할 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대학의 경우 정교수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것처럼 학예사들이 정규직으로 안착까지 필터링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출신의 C씨는 “지금의 평가 매뉴얼로는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미국 게티 미술관 등 선진적인 평가 매뉴얼을 수입해 활용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또 “관장에게 실질적인 인사권이 있어야 한다. 성과가 없을 때 퇴출할 수 없다면 임기 3년짜리 관장이 조직을 장악하기는 힘들다.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고 우려했다.

반대론자는 현대미술을 다루는 기관으로서의 특성을 가장 큰 반대 이유로 꼽았다. D씨는 “공무원화되면 실험적인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학예직을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으로 만드는 것은 미술관을 박물관화시켜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근대 미술도 아니고 현재 진행형인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사람들이 영구히 자리를 보전하고 앉아 있으며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직무별로 융통성 있게 대응해서 근대 및 연구 분야, 소장품 관리 등은 정규직화해서 업무 연속성을 보장하고, 변화가 빠른 미디어 아트, 다원 예술 등은 5년 단위 전문임기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술관장 출신의 E씨는 5년보다는 기간이 긴 10년 단위 전문임기제를 제안했다. 미술기획자 F씨는 “한 큐레이터가 ‘장기 집권’하면 결국 그의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은 작가들은 영영 발탁될 기회를 뺏길 수 있다”며 배제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역시 미술관장 출신의 G씨는 “정규직은 연구한다는 핑계로 관료화되고 또 다른 형태의 계약직 하청업체가 일을 맡아서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술관장 출신의 H씨 역시 “모든 학예사를 정규직 붙박이로 뽑으면 늙은 조직이 된다. 적폐가 된다”고 했다.

계약직에 대한 인식 문제도 지적됐다. H씨는 “이번 조치는 계약직이 불량 일자리라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 계약직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 베이스로 얼마든지 비정규직을 채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장기인력 운용계획이 사전에 공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모 절차가 진행된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H씨는 “다른 나라 상황을 조사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인력 운영방안이 먼저 나왔어야 했다”고 말했다. 기타 의견을 표시한 I씨도 “적절한 직무 구분과 인력 운영계획이 선행됐어야 했다”며 같은 입장을 보였다. 작가 J씨는 “정규직화 문제가 공론화가 안 된 상태에서 공모 절차가 진행된 것은 문제가 있다”고 거들었다.

<설문 응해주신 분(가나다 순)>
강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 기혜경(부산시립미술관장),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김영순(전 부산시립미술관장), 김영호(한국박물관회 회장), 김창겸(작가), 변순철(작가), 양철모(작가), 오세원(씨알컬렉티브 대표), 용호성(문체부 공무원),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이수균(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이승미(전 인천아트플랫폼관장), 이영욱(미술평론가), 이지호(전 이응노미술관장)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