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보다 성숙해 보이는 아이들은 때로는 욕구를 억압하고 있는 아이일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아인 T는 매우 스마트하여 공부든 뭐든 스스로 잘하고 성숙한 편이다. 그래서 학교에도 잘 적응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학교에 가는 것을 불안해 하고, 집에선 화를 많이 내었다.
T의 엄마는 역시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다. 유능한 커리어 우먼으로 직장에서도 꽤 인정을 받았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성적인 따뜻함, 여성성은 부족한 편이었다. 엄마는 평소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다. 언어 구사력이 좋은 아이와 대화가 잘 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T가 조숙한 면이 있으니, 성인처럼 존중하며 동등하게 대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처럼 쿨하게 대화를 나누어 왔다. 대개 대화는 학업적 성취, 학원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에 대한 평가, 공부 방법에 대한 조언 등등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그랬지만 T에 대해서도 성취와 성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아이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 당연히 아이의 감정이나 욕구는 알아채지 못하였다.
진료실에서 처음 T와 놀이를 시작하였다. 아이는 긴장한 채 모래상자에서 모래를 주무르고 모래 가루를 손으로 만지고, 손등에 뿌리는 등의 행동만을 반복적으로 하였다. 이러기를 한참 한 후에 긴장이 풀어진 후에는 조금 씩 피규어들을 가져다가 모래상자에서 놀이를 시작하였다.
상어가 불쌍한 캥거루를 잡아먹으려 쫒아 다니고, 캥거루는 상어에게 잡아먹혀 상어의 뱃속에 갇혀 버리는 놀이를 반복하였다. 그 놀이에서 T는 자신을 불쌍한 캥거루에 동일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엄마 캥거루의 주머니에 있는 불쌍한 아기 캥거루와. 알다시피 캥거루는 아기 주머니에 아기를 품고 지내는 동물이다. T는 엄마와의 일체감을 경험 하고 싶었다. 상어에게 쫒기는 위협감에서 보호받고 싶었다.
사람은 양육자에게서 일체감과 의존성을 충분한 기간 느끼고 만족하면 비로소 아기 주머니에서 독립하는 캥거루처럼 적당한 시기에 독립성을 획득하고 자율성을 갖게 되는 거다. 하지만 T는 엄마의 성향과 상황적인 기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독립적인 것처럼 생활해 왔지만 억압되었던 의존 욕구가 뒤늦게 터져 버려 엄마를 떨어져 학교에 가는 것마저도 무섭고 불안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욕구를 몰라주는 엄마에 대해 화를 내면서 반항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을 친 거다.
엄마도 아이의 욕구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고 이것들을 채워주려고 노력하였다. 이성적인 대화보다는 함께 놀이하면서 같이 깔깔 웃고 몸을 부비고, 안아주고 스킨십도 늘리고 하면서 아이는 어리광도 부려보고 하면서 조금씩 만족감이 늘어났다. 반항도 줄고, 화도 줄어 갔으며, 학교에 가는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진료실에서의 놀이에도 변화가 있었다. 모래상자에 다양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아기 캥거루는 주머니에서 나와 초원에서 뒹굴기도 하고, 나무 위를 씩씩하게 오르기도 하였다. 물속에도 들어가 헤엄을 치며 놀기도 하였다. 물레방아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였다. 충분히 엄마의 주머니에서 보호 받은 아이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자유로와 진거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