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과회통’과 ‘촌병혹치’로 백성을 살린 茶山!

입력 2020-02-26 23:32 수정 2020-02-27 01:3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웃나라 중국에서 시작하여 조마조마하던 우리는 한순간에 집단발병으로 세계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인간들이 나약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로 그야말로 거칠게 없듯이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세상이 느닷없는 세균 한 무리에 인간들은 공포에 떨고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초스피드 초연결 사회라는 지나친 질서의 혼란에 의하여 사회질서가 교란되고 이러한 것들이 세포 조직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홍역을 치른 다산!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76년 15세 때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홍역에 걸렸다. 한달 동안 병을 앓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산은 그 당시 이헌길의 치료를 받아 홍역을 치유하게 되면서 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다산의 경험은 황해도 곡산부사로 갔을 때 그 지방에 유행한 홍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마과회통(麻科會通)으로 백성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하였다. 마과회통 서문을 보면 다산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내가 이미 이몽수(李蒙叟)로 말미암아 살아났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몽수(蒙叟)의 책을 가져다가 그 근원을 찾고 그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마진에 관한 책 수십 종을 얻어서 이리저리 찾아내어 조례(條例)를 자세히 갖추었으나,”
-다산시문집 제13권 / 서(序)

유배지에서 쓴 “촌병혹치”!

그뿐만이 아니다. 다산은 1801년 그의 나이 40에 형인 정약종이 천주교 관련 서적과 문서 등을 옮기다가 한성부에 발각되는 책롱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치적으로 다산을 없애기 위해서 구실을 찾던 때였다. 이런 연유로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체포되어 형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여기서도 다산은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저술한 책이 바로 “촌병혹치”이다. 자식들이 보낸 의서(醫書) 수십 권과 약초(藥草) 한 상자를 갖고 이를 바탕으로 책과 약을 처방하여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였던 것이다. 촌병혹치 서문(村病或治序)에서 어떻게 책을 저술하였는가를 쓰고 있다.

하루는 객관을 지키고 손님 접대를 하는 사람의 아들이 청하기를,
“장기(長鬐)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면 체념하고 죽어갈 뿐입니다. 공(公)은 어찌하여 공이 보신 의서로 이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까.”하기에, 나는, “좋다. 내가 네 말을 따라 의서를 만들겠다.”하였다.
-촌병혹치 서(村病或治序) / 다산시문집 제13권

공포나 위축 대신 침착한 자세!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시대 구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 인간들을 괴롭혀 왔다. 200여년전 다산이 백성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듯이 현재 수많은 목민관들과 전문 인력들이 현장에서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루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베테랑 소방관의 이야기를 귀담아 이 위기를 극복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화재시 가장 안 좋은 경우가 고함과 비명으로 사람들이 무턱대고 사방으로 내달리면서 서로 부딪치고 넘어져 질식사와 압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경우는, 영화관 화재시 숙련된 안내원들이 관객을 탈출 시킬 때로 안내에 따라 안전하게 대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내원의 리더십이 아니라 관객들의 협조 때문이다. 비명이나 고함 대신 침착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위로 하며 침착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우리는 극복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인드로 개인 예방에 힘쓰는 일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글=다산정신실천연구소 진규동 박사).

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