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오페라계에서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일삼았다는 폭로에 휩싸인 세계적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79)가 25일(현지시간) 사과했다. 그러나 도밍고가 20명의 여성이 제기한 성폭력 의혹을 반년간 부인해왔던 데다 사과 내용도 피상적 수준에 그쳐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나온다.
도밍고가 “내가 여성들에게 입힌 상처를 미안하게 여긴다는 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며 “내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인정한다”고 밝혔다고 이날 AP통신 등 외신들은 전했다. 전날 미국오페라노조(AGMA)가 자신의 성희롱 고발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한 뒤 하루 만에 나온 사과 성명이었다. 그는 “이제야 여성들의 공포를 이해하게 됐다”면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그렇게 느껴서는 안 된다. 누군가 같은 경험을 하지 않도록 오페라 산업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헌신하겠다”고도 말했다. 현재까지 도밍고의 성희롱 등 부적절한 행위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20명에 이른다.
도밍고는 세계 오페라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60여년 간 4000회 이상 공연에서 150여개 역할을 맡았고, 그래미상도 수차례 받았다. 워싱턴오페라와 LA오페라의 예술감독 및 총감독을 역임했던 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이름을 떨쳤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여성 성악가와 무용수들을 다수 성추행했다는 도밍고를 향한 폭로들이 지난해 8월 터져 나오자 세계 음악계가 들썩였다.
지난해 9월부터 사건을 조사해온 노조 측은 도밍고가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음악 작업 공간 안팎에서 여러 형태의 성희롱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음악계에서는 도밍고의 이 같은 사과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일례로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 성악가 루즈 데 알바 루비오는 “그는 잘못을 부인하면서 희생자인 척했다. 정말로 반성했다면 자신에게 고통받은 여성을 만나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날 도밍고가 노조 측에 50만 달러(약 6억800만원)를 기부 형식으로 주면서 자신의 조사 결과를 묻으려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성폭력 조사 결과에 대한 발표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거래가 오갔지만 내용이 유출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도밍고가 에둘러 표현한 사과의 진정성은 더 큰 의심을 받게 됐다.
가장 큰 문제는 도밍고의 향후 행보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공연계에서 퇴출당한 미국과 달리 유럽 등 다른 지역에서 도밍고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해 그의 성폭력 보도 이후 치러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라 스칼라 극장 등 유럽 공연에서 그는 수십분에 걸친 기립박수를 받았다. 도밍고가 1960년대에 활약했던 이스라엘 오페라단은 지난 18일 성폭력 반대 운동가들의 반대에도 그가 주최하는 성악 콩쿠르 ‘오페랄리아’를 올해 말 개최하기로 했다. 또 도밍고가 성장한 멕시코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과 콘서바토리가 만들어질 계획이다.
이용숙 오페라평론가는 “음악가로서의 업적이 뛰어나다 보니 도밍고를 향한 미투 이후에도 잘못을 무마하려는 움직임들이 적지 않았다”며 “실력 때문에 도덕적 잘못을 눈감아주는 관행은 오페라계의 발전을 위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