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화제가 알콩달콩한 사랑을 뽐낸 현빈과 손예진에게만 쏠린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재벌 여인 세리(손예진)와 북한 엘리트 장교 리정혁(현빈)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이 작품에서 정혁의 부하들인 5중대원은 첫 회부터 단박에 시선을 붙들었다. 한국에선 미지의 영역에 가까운 북한군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가 아니다. 면면이 너무나 재기발랄하고, 또 유쾌해서다.
그중 5중대 중급병사 김주먹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드라마 열성 팬으로 등장한 김주먹은 사고로 별안간 북한에 불시착한 세리와 5중대원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잇는 가교였으면서, 시종일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드라마 인기에 힘을 보탠 주역이었다. 6%(닐슨코리아)대로 첫발을 뗀 드라마가 20% 시청률을 넘기며 인기를 끌 수록 주먹 역을 자연스레 소화한 배우 유수빈(28) 역시 함께 빛을 냈다.
그렇다면 유수빈만의 김주먹은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만난 유수빈에게선 수차례 오디션으로 직접 따낸 배역인 김주먹에 대한 애정이 툭툭 묻어났다. 유수빈은 “코미디 장면이 많았다. 순수하면서 단순한 인물의 모습을 부각하려 리액션들을 하나하나 연구했다”면서 “한숨이나 표정, 행동 하나하나를 꼼꼼히 계산했다”고 전했다.
‘한류 드라마 팬인 북한군’이라는 이채로운 설정에, 찾아서 연구할 레퍼런스도 마땅치 않았다.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고 북한말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며 북한 사투리를 다듬어 나갔다. ‘두라마(드라마)’ 등 단어도 말맛을 살리기 위해 직접 다듬은 것이었다. 유수빈은 “상상을 하고 메모하고, 그것을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사실 박지은 작가님의 대본 자체가 너무 재밌었다. 누가 했어도 잘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어 보였다.
주먹이 가장 돋보였던 장면으로 드라마 ‘천국의 계단’ 속 소라게 장면을 패러디한 신이 꼽힌다. 유수빈 역시 온라인에서 줄곧 회자됐던 이 장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신으로 꼽았다. 그는 “저한테 붙은 단독신이다 보니 무엇보다 부담이 많이 됐다. 재밌게 표현돼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고 떠올렸다. 당시 극 중 카메오로 출연한 최지우를 만난 것에 대해선 “선배님께서 먼저 ‘드라마 잘 보고 있다. 캐릭터가 정말 좋은 것 같다’라고 말을 걸어주셔서 긴장을 훌훌 털어냈다”며 고마워했다.
본인의 말처럼 “유수빈의 평생 운을 끌어다 쓴, 영광스러운 작품”이었지만, 극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힘에 부쳤다. 막바지 촬영 스케줄이 빡빡했던 데다 분량도 조금씩 많아져서다. 그럴 때면 극을 전면에서 이끌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않던 현빈과 손예진을 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수빈은 “현장에서의 프로페셔널함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빈 선배님은 연기 열정이 대단하시고, 손예진 선배님은 집중력이 뛰어나시다”며 “두분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느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된다고 나를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가족과 다름 없는” 양경원(표치수 역), 이신영(박광범 역), 탕준상(금은동 역) 등 5중대원들 역시 촬영 현장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고 한다.
행보가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2016년 장편 영화 ‘커튼콜’로 데뷔한 유수빈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깜빵생활’을 시작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940만 관객을 동원한 재난 영화 ‘엑시트’, MBC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등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활약했다. ‘사랑의 불시착’은 그간 쉼없이 달려온 그에게 주어진 보람찬 ‘선물’이었던 셈이다.
유수빈이 연기를 꿈꾸게 된 계기 역시 담백하지만, 특별한 면이 있다. 그는 “고등학생 때 농담하고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해 코미디언을 할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얘기하곤 했는데, 사실 마음 속에선 계속 배우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국어책을 봐도 희곡 대본의 대사들을 읽는 것을 즐겼다”며 “고등학교 2학년이 돼 연기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도 연기를 전공했다. 지금도 늘 시간 날 때면 연극을 본다”고 했다. 그야말로 ‘연기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PC방과 극장,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차곡차곡 연기실력을 쌓았다. 연습과 실전이 다를 법도 한데, 갈수록 재미가 붙는단다. 유수빈은 “직업을 참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통통 튀고 자유로워 좋다”며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 스스로 믿음이 간다. 천천히 가더라도 진짜 오래 연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이날 유수빈은 때로 발랄했지만, 진중한 모습을 이어갔다. 배우로서의 삶이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또박또박 전할 때가 특히 그랬는데, 시종일관 명랑함을 잃지 않았던 김주먹과는 또 색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연기도 단단하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그 무엇이었다. 유수빈은 “빠르게 이루기 보단 지금처럼 느리더라도 똑바로 길을 짚어가면서 성장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희준 선배님이 롤모델이에요. 어떤 작품의, 어떤 캐릭터도 찰떡같이 소화해내시잖아요. 저 역시 다양한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엔 악한 얼굴의 역할도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웃음).”
강경루 기자, 영상=최민석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