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연극계 원로 “한일 관계 요동쳐도, 연극교류 18년간 이어져”

입력 2020-02-25 14:25 수정 2020-02-26 17:59
연극 '다스 오케스터'의 한 장면. 서울문화재단 제공


“교류는 ‘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8년간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았는데, 포기 않고 만나면서 신뢰를 쌓아왔어요.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도 점점 늘어났죠.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같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연극에 큰 관심을 보여준 한국 관객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일본 연극평론계 거두 오자사 요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21일부터 3일간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2002년부터 18년간 양국을 한 번씩 오가며 9회를 맞은 이 낭독공연 행사에 대해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 작품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며 “일본은 낭독공연 표가 유료인데도 매진된다. 취소되길 기다리는 관객도 많다. 연극 ‘목란언니’ ‘해무’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덧붙였다.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그만큼 깊어지는 게 사람 관계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문화교류 단절은 흔히 외교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곤 한다. 현대일본 낭독공연은 요동치는 한일정세 속에서도 20년 가까이 연극을 통해 서로의 체온을 전해온 민간 교류 사업이다. 한일연극교류협의회(회장 심재찬)와 일한연극교류센터(회장 오자사 요시오)가 손잡고 격년마다 양국 희곡을 번역·출판하고 낭독공연을 올리는데, 지금까지 양국 각각에 45편의 현대 희곡 작품이 소개됐다. 심재찬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회장은 “격변하는 국가정세에도 양국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민간 교류가 지속할 수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쁘다”고 했다.

많은 관객이 이번 낭독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올해는 노기 모에기 작가의 ‘다스 오케스터’(연출 정진새), 야마모토 스구루 작가의 ‘그 밤과 친구들’(연출 민새롬), 시라이 케이타 작가의 ‘Birth’(연출 박근형)이 하루에 한 개씩 선보였다. 독일 나치의 탄압에 고민하는 예술가, 현대 보이스피싱 등 다채로운 소재의 작품들이었다.

23일 행사에 마침표를 찍는 심포지엄에는 ‘한일연극교류의 미래’를 주제로 양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토론을 펼쳤다. 일한연극교류센터 사무국장으로 10년간 일해온 연극제작자 오타 아키라는 “많은 (한국) 작품이 반복해 일본에서 공연되고, 한국인 극작가의 신작이 공연을 앞두고 있다”며 “한일 양국의 국립극장 교류기획과 공동제작에서 민간 극단끼리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상대방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에도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교류해 가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공공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연극계는 제작 과정에서 지원금 문제에 늘 시달리곤 한다. 정치적 환경에서 연극계가 독립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도 상황은 비슷하다. 오타 아키라는 지난해 가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평화의 소녀상’ 등이 출품됐다는 이유로 전시가 중단됐던 ‘표현의 부자유전’을 언급했다. 그는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신청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문화청 조성금 전액이 교부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며 “지난해 일본에서의 낭독공연 때 매번 선정돼 오던 문화청 조성금 역시 끊겼다”고 상황을 전했다. 또 “그런 가운데 내년도 (조성금) 신청이 시작됐다”면서 “신청 요강에는 ‘공익성의 관점에서 조성금 교부내정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는 문구가 첨가됐는데, 이런 흐름에서 한국 박근혜 정권 당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흡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일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검열을 떠올리게 된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교류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은 전문가들 모두 같았다. 박근형 연출가의 ‘대대손손’ 등 한국 희곡 작품을 일본에 소개해 온 연출가 겸 극작가 시라이 케이타는 “양국에는 역사 정치적으로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둘도 없는 한국인 친구들은 모두 ‘국가 간의 어려운 문제는 있지만, 우리한텐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한다”면서 “인간과 인간이 이어질 때 국가의 문제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연극 역시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국가나 정치를 초월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이성곤 연극평론가 겸 한일연극교류협의회 부회장,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등이 이날 자리에 참석해 양국 연극의 현황 등을 공유했다.

본래 10회를 목표로 기획된 이 행사는 양국에서 행사 1회씩을 남겨두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2년에 행사가 마무리되는 셈이다. 이성곤 부회장은 “낭독공연이 끝난 이후 지속할 수 있는 교류 모델에 대해서도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