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감염 받아들여야” “정부 ‘안심 메시지’ 섣불렀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수천명 수준으로 불어날 수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확진자 증가 속도를 볼 때 이미 광범위한 지역사회 감염이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확진자 대량 확산이 의료 체계의 마비 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의료전달 체계를 시급히 재정비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제2 제3 대구 나올 수 있다
“봇물이 터진 거라고 봐야 한다. 대구 외에 다른 곳에도 바이러스가 퍼져 있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대비를 해야 한다.”
최강원 명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4일 현재의 한국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현재 드러난 ‘감염병 군집’은 신천지와 청도대남병원이지만 이는 증상이 눈에 띄는 사람들 위주로 추적해 나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의 암울한 상황인식에 다른 전문가들도 동의했다. 천병철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여러 지역에서) 계속 환자가 나오는 걸 보면 지금보다 이전에 감염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도 대구처럼 유사한 감염 군집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말했다. 그는 “역설적으로 보면 대구는 초기 군집을 잡아냈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본격적으로 유행하면 피해는 제일 적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아직 발견만 되지 않았을 뿐 이미 신천지처럼 다량 감염된 군집이 있다는 의미다.
지역사회 감염의 첫 사례인 29번 환자 등장 때 이미 이 같은 현실은 예견됐다는 게 대부분의 시각이다. 천 교수는 “코로나19는 초기 증상이 아주 약하지만 전파력이 높아 무증상 감염 형태로 쉽게 확산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계속 얘기해왔다”며 “노인이나 만성질환자와 달리 젊은 사람은 증상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발견이 잘 되지 않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실제 발생 초기에는 고령·기저질환자 위주로 전염이 확대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비교적 건강한 젊은층의 무증상, 경증환자들이 확진자로 발견되고 있다.
의료체계 재정비 시급
전문가들은 추가 확산의 저지를 위해 우선적으로 검역 및 방역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천 교수는 “여행력이나 확진자 접촉 여부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 역학조사는 취미·종교 생활을 통해 군집으로 퍼질 수 있는 부분을 놓칠 수 있다”며 “보다 광범위한 형태의 역학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행 초기에는 발열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는데, 지금까지의 환자를 살펴보면 발열 증상자는 30% 수준밖에 없었다”고 했다. 천 교수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직장의료보험을 가진 집단에서 (그동안 없었던) 폐렴환자들이 많이 나온다면 이런 데이터 분석이 감염 군집을 찾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제안도 했다. 의료보험 빅데이터를 활용해 ‘깜깜이 환자’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김탁 순천향대 감염내과 교수는 “29번이나 30번 환자처럼 감염원을 알 수 없는 경우 이들을 누가 감염시켰는지 찾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들에 의해서 또 다른 ‘감염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감시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료체계 재정비는 시급한 사안이다. 이미 음압병실이 포화상태인 만큼 당장은 병실수급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곧 경증환자들이 입원하기 어려운 시점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경증환자들은 자가격리에 들어가도록 하고 10~20% 정도로 예상되는 중증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관이나 시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장욱 고려대 안암병원 감염내과 교수도 “일반환자와 확진자를 같은 곳에서 치료하려다 보니 음압병동이 필요한 것인데, 확진자들만 모아서 치료를 하면 그런 게 필요가 없다”며 “대부분 확진자가 경증이기 때문에 시립병원이나 의료원급 의료시설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대학병원에서는 중증환자나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를 보는 방식으로 의료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 시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기관을 이원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의료시스템이 ‘셧 다운’되는 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대량 발생한 대구의 경우 응급실 폐쇄 등으로 중증 응급환자 발생 시 의료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병원이 기존 질환 환자도 돌봐야 하는 데 확진자가 심각하게 늘어날 경우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며 “선제적 대응을 위해 공공 의료자원뿐만 아니라 민간 자원까지 투입하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모란 대한예방의학회 코로나19 비상대책위원장도 “코로나19 환자와 일반 환자에게 각각 전달해야 할 응급의료체계를 만들고 의료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중국 전역으로부터의 입국 제한 조치’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부 엇갈렸다. 박 대변인은 “감염총량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중국 입국 제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유입을 강력히 차단하는 조치는 1월부터 했어야 하는 만큼 이미 늦은 감이 있다”며 “(중국 유학생 등이) 계속 들어오는 것보다는 막는 게 낫다”고 했다.
무엇을 실기했나
전문가들은 정부의 안일한 상황 인식에 아쉬움을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가 너무 일찍 ‘안심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사회 내 경각심이 약화된 게 사태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22일과 24일 울산에서 발생한 확진자 2명은 지난 16일 신천지 종교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40번 확진자는 지난 11일 기침증상이 발생해 13일까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가 14일 성동구 소재 식당, 동대문구 소재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우한 교민 아들인 부산 1번 확진 환자는 지난 19일 부산 온천교회에 머물렀고, 같은 기간 교회에서 진행된 자체 수련회 참가자에서 무더기 확진자가 발생했다. 31번 확진자는 지난 16일 대구 신천지 종교행사에 참여했다.
이 같은 활동은 “검역 당국이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다”(문 대통령) “보통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나 공기가 탁한 곳이 아니면 (굳이)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정세균 총리) 등의 낙관론이 쏟아진 직후였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국민의 공포가 과도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정부도 섣부르게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꺼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종식 얘기를 듣고 다 기절했었다. 헛발질 차는 것처럼 답답한 측면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다.
전염병 분야는 과학의 영역인데 정부가 전문가를 믿지 못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 대변인은 “의료진들이 비전문가들을 설득하느라 시간낭비를 해서 확산을 막을 타이밍을 놓친 측면도 있다”며 “이건 전문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비전문가가 컨트롤타워인 상황인 만큼 지금이라도 전문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예방의학과 교수는 “현재 보건당국에 전문가는 본부장 한 명 뿐 아니냐. 정부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줄곧 의료 전문가들과 다른 메시지를 내놨다”며 “확산을 막을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문가 집단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다른 의료계 관계자는 “방역은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과학 기술의 문제다. 정부나 정치인들이 따뜻한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비판했다.
김유나 정현수 임주언 김판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