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과 청 행정관, 쌀 한 포대와 고기의 우정

입력 2020-02-20 16:15 수정 2020-02-21 01:47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격려 오찬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둘째는 봉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받은 대학 동기 육성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며 역사를 써낸 봉준호 감독과 육성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의 우정이 화제가 되고 있다. 서로 힘들 때 쌀과 고기를 나누던 두 친구는 ‘인권’과 ‘부조리 혁파’를 키워드로 각자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두 사람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세대 사회학과 88학번 동기였던 봉 감독은 대학생 시절부터 영상 연출에 탁월했다고 한다. 육 행정관이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봉 감독은 대학시절 학보 만평을 통해 학내 문제와 정치사안을 대비하는 솜씨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록카페 열풍과 일본 종교인 ‘창가학회’의 유입 실태를 본격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봉 감독은 특유의 정의감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대부분의 영상에 사회 풍자와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왔다는 게 육 행정관의 회상이다. 그의 사회 참여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봉 감독은 1990년 여름 친구들과 농촌 봉사활동을 가기로 한 날 오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화염병처벌법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육 행정관을 비롯한 친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가 봉 감독의 초기작인 ‘살인의 추억’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대학가 화염병 시위 장면이었다.

육 행정관은 봉 감독이 결혼 후 조연출로 일하며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당시 쌀 한포대를 나눠준 적이 있다. 봉 감독과 통화하다가 생활고를 듣고 시골에서 가져온 쌀을 갖다 준 것이다. 육 행정관은 경기도 안성 출신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과 마더, 괴물, 옥자, 설국열차 등을 통해 사회 부조리, 양극화를 지적해온 봉 감독처럼 육 행정관도 약자의 인권 증진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일요신문과 신동아 기자를 거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했다. 육 행정관은 인권위 재직 당시 인권위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괴로웠던 시절, 그를 찾은 건 봉 감독이었다. 봉 감독은 육 행정관을 불러 배가 부를 정도로 고기를 사줬다고 한다. 쌀로 베푼 친절이 고기로 돌아온 것이다.

현재 육 행정관은 청와대에서 각종 시민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봉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을 챙기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를 만난다. 2018년에는 국제관함식을 반대하는 강정마을을 찾아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봉 감독과 육 행정관이 친구로서, 각자의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