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갈라선 영국과 유럽연합(EU) 사이 관계를 재조정하는 ‘이혼 협상’에서 고대 그리스 유물 반환 문제가 새로운 갈등의 씨앗으로 떠올랐다.
로이터통신 등은 18일(현지시간) 영국과의 미래 관계 재설정을 위한 EU 27개 회원국 측 협상 입장문 초안에 “불법적으로 빼앗긴 문화재를 그것들이 원래 위치했던 본국으로 되돌려보내거나 배상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실렸다고 보도했다. 한 EU측 고위관계자는 해당 문구가 그리스의 요구에 따라 삽입됐으며, 키프로스와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모두 자국의 도난당한 고대 예술품들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구체적인 반환·배상 대상이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 유물인 ‘엘긴 마블’을 염두에 둔 조항이라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200여년 전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오스만제국 영국 대사였던 토머스 엘긴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신전을 장식하고 있던 대리석 조각품들을 런던으로 옮겼다. 그의 이름을 따서 조각품들에는 엘긴 마블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대영 박물관에 보관 중인 엘긴 마블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영국은 오랜 시간 갈등을 빚어왔다. 엘긴 마블에 대해 그리스는 영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훔쳐갔다며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영국은 엘긴 대사가 오스만제국과의 합법적 계약을 통해 획득했다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엘긴 마블 반환 캠페인에 속도를 내겠다는 입장이다. 브렉시트로 영국의 유럽 내 영향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더 많은 EU 회원국들이 그리스의 반환 요구에 지지를 보낼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초안 작성에 관여한 한 EU 대사를 인용해 “이번 결정은 브렉시트가 어떻게 (영국과 그리스의) 게임을 바꿔놨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라며 “그리스는 이번 협상을 엘긴 마블을 되찾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갑작스레 불거진 유물 반환 논란을 EU와 영국이 다음 달 초 시작되는 미래 관계 협상을 앞두고 벌이는 기싸움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국이 지난달 31일 EU를 공식 탈퇴하면서 양측은 전환 기간이 끝나는 올해 말까지 협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무역 부문 등에서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은 EU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대다수 수출 품목에서 관세를 면제받는 캐나다식 무역협정을 거론하고 있지만 EU는 절대 불가 방침이다. EU가 영국 측 요구에 대한 불만의 의미로 유물 반환 문제를 꺼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