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PD는 생전 CJB청주방송에서 14년간 프리랜서 PD로 근무하며 매달 160여만원을 손에 쥐었다. 서면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그는 처우 개선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프로그램 하차 통보였다. 지난달 청주방송의 근로자로 인정해달라는 법정 다툼에서 패한 이 PD는 끝내 지난 4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전국언론노조와 직장갑질119 등 55개 단체는 19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요구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책위는 출범선언문을 통해 “이 PD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차별과 혹사에 시달려야만 했다”며 “이 PD 사망 이후 청주방송은 각종 조치를 약속했지만 모두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이 PD 사망 및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등에 관한 조사에 나설 예정이다.
대책위는 방송국이 불안정한 위치의 이 PD를 쥐어짜내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 PD는 청주방송에서 해고되기 전 3년간 한해 평균 10건 이상의 프로그램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조연출부터 연출, 행정, 사업 계약 업무까지 맡아야 했다.
하지만 청주방송과 법원은 그를 정식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PD는 2018년 직장갑질119에 “언젠가 고생한 거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으로 달려온 시간이 억울하다”며 “제 다음 생에 후배들은 비정규직의 설움을 못 느꼈으면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억울해 미치겠다”고 적혀있었다.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제2의 이재학’은 곳곳에 있었다. 한 지역 방송국 PD A씨는 본사 출신인 국장의 모욕과 폭언에 시달렸다. 국장은 A씨에게 개인 운전기사처럼 운전을 요구하거나 개인 공과금을 납부하게 했고, 일을 할 때는 “뇌가 없냐”고 조롱도 일삼았다. 방송작가 B씨는 “근로계약서도 쓰지 못한 채 몇 달간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턱없는 수준의 임금을 감내해야 했다. 프리랜서 작가 C씨는 월급 협의도 없이 밤새 주어진 일을 했지만 한 달에 100만원도 받지 못했다. 임금 체불도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프로그램 프리뷰 일을 하고는 월급 대신 상품권을 받았다는 제보도 있었다.
대책위는 “방송사들이 노동 착취의 구태에 빠져있지만 시대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다”며 “비정규직 문제를 즉각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