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어쩌다 재수 없어서 바닥을 쳐서 청소부가 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청소부는 어쩌다 운 좋아도 검사가 될 수 없어.”
2월 7일부터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터널구간>(작 이상례, 연출 오유경)에서 터져 나오는 대사 한마디다.
한국사회의 모순된 현상을 날카롭게 투영하는 말이다. 자본의 논리에 얽매인 인간의 욕망과 처참한 말로를 초현실주의적 연극언어로 구현한 <터널구간>은 2019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부문 1차 지원 작 110편 가운데 최종 선정된 8편 중 한 작품이다.
연극제작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인 ‘창작산실’의 기대의 비중은 높다. 그러나 창작산실 작품 선정과정부터 공연된 작품들이 지원금에 비해 성과와 작품 구현의 무게에 대해서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이 작품은 1억1400만원이 지원되었다.
전이(轉移)의 경계에서 바라본 향락과 욕망의 서사
<터널구간>은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인간들의 자본에 대한 탐욕을 응축된 긴장감으로 몰아넣는다. 삶의 현실을 밀착하며 화려한 원색과 양식화된 움직임, 화술의 강렬한 파괴력을 쏟아낸다. 그 파열음에서 터져 나오는 부의 세습을 위한 신분상승 욕망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유람하며 인간의 내면을 인상적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낯익은 연극적 상징과 과한 표현의 자극과 충돌은 생산적인 사유의 틈으로 변주되지 못할 때 터널을 뚫고 나올수 없는 양식으로 정체된다. 의미는 망각되어 연극은 생명력 있는 존재가 아닌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작품이야기로 돌아가자. 작가는 우리 사회 내부의 근원적인 것들에 주목하려 한다. 가부장적인 폭력, 가족 간의 소외와 삶과 죽음, 소멸과 생산, 주변과 중심은 우리 삶 속 본질을 관통하며 터널구간을 향해 달린다.
악착같이 자수성가한 장씨 부부는 ‘검사 아들-의사 딸’이라는 계획이 좌절되자 역으로 ‘검사 사위-의사 며느리’라는 욕망의 청사진을 그려 실행을 도모한다. 부모의 독단적 폭력에 노출되어 성장한 자식들은 부모에 순응하면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소극적 저항을 꿈꾸지만 결국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그들의 양가적 좌표는 혼돈의 소용돌이 안에서 회의적이고 모순되게 표현된다.
장씨의 칠순 날, 살인사건에 휘말린 딸을 통해 관객은 딸과 희생자와의 관계를 짚어가는 검사를 만나고 장씨 가족은 그에게서 파생된 새로운 가족과 직면한다. 진실탐닉을 위한 전형성의 한계를 넘기 위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의 본질적인 특징을 구현한 상황이나 인물간의 상호개연성으로 리얼리티를 구사해야 한다.
<터널구간>에서는 알레고리와 상징적인 양식이 당위의 형식, 유희의 형식으로 갈등을 전개시키며 우리사회의 구체적이고 문제적인 풍경만을 도려낸다. 그러나 보니 성찰적인 탐구와 사색하는 사유가 결여된다. 단순한 고발에 머무른다. 삶과 인간의 욕망이 <터널구간>에 정체해 있는 한 가족의 시선과 모순들을 자극적으로 나열해 놓고 정작 시선 위에 존재하는 무대언어는 농밀한 진상(眞相으)으로 치환시키는 동력이 부족해 터널구간을 안전을 하게 달리지 못했다.
날개가 꺾인 현재, 날지 못하는 미래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딸 미래와 가까이 지내던 현재였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며 오랜 시간 짝사랑하며 속을 태우던 현재와 미래는 같은 과거를 공유했지만 현실적인 시선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눈에 불을 켜고 검사 사위를 찾는 미래 부모님의 기준으로 청소업체 직원인 현재는 어림없는 조건임에 틀림없겠지만 미래 또한 현재와 동반하지 않는다.
껍데기, 포장, 허상, 거짓말이 메아리치는 허공 속에서 맴도는 자아의 혼란 속에서 미래의 손을 놓친 현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미래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조리함을 일삼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래의 아름다움을 쫒는 현재는 날개가 꺾여 추락하고, 건강한 현재가 없는 미래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한다. 두 사람의 어긋난 만남은 과거-현재-미래의 현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하며 진실된 현재와의 소통 없는 미래는 현실을 뒤쫓지 못한다는 인식을 귀결시킨다.
오히려 숙주에 기생해 상생하려는 장씨 가족의 기생충 습성보다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심보를 당연시하는 검사가족의 흉포한 내면은 부와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권력의 민낯을 들어낸다. 대극장에서 양식화된 속도감 있는 장면전환에 몰입하다보니 배우들은 대사의 톤을 높여 정확한 대사를 전달시키지 못해 관객의 집중도가 흐려지게 한다. 사물의 본질을 포착해 내는 예리한 표현 미학이 부재된 과장된 원색의 의상과 조명, 분장은 실험적이었으나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지는 못했다. 구시대적인 예술 키워드인 시대의 어두운 문질만능주의 모순과 인간의 통증들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있다. 무대 위 인간군상은 경험과 갈등, 분열을 교차시키며 존재의 의미와 의미심장한 심연을 응시하지만 진지한 연극적 교감이 반감되어 전달된다.
시대의 명암을 드러내며 분해된 파편
<터널구간>은 자의식 과잉의 불편한 독백이 출몰하는 병렬식 질서로 이루어진 배우들의 독백과 대사가 충돌하며 서사된다. 미래 아버지가 물려줄 건물을 사랑한 검사는 오로지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자신이 갈구하는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만을 원한다. 그에게는 자기에게 물려줄 건물만 건재하다면 미래 아버지가 사망을 하든, 미래의 친정이 몰락하든 관심이 없다. 미래의 무너진 친정 앞에서도 검사는 의연하고 집요하게 미래와의 결혼을 주장하는 이유는 건물이 아직 미래의 소유라고 조사했기 때문이다. 줄행랑 친 검사뿐 아니라 자식들도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거리에 나앉게 된 식솔들을 건사하려고 나서지 않는다.
공포의 무의식을 직시하는 순간 불가능한 탐욕의 강박은 소멸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물어진 굴곡진 인간의 결을 직선으로 변형시키지는 못한다. 연일 신문 사회면과 뉴스방송에서 접하는 사실과 이미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문제되었던 자본과 권력이 감추려고 하는 진실을 드러내며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는 지점에서 연극 <터널구간>은 현실의 풍경을 도려내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연극 안의 말과 현실의 말이 포개지지 않는 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형식적으로 기발하거나 새롭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자본주의적 시장논리가 창작산실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