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거 대상도 셀럽 위주로…포퓰리즘 물든 트럼프식 대테러작전

입력 2020-02-17 15:09 수정 2020-02-17 15:10
미 중앙정보국(CIA)이 배포한 오사마 빈라덴의 아들 함자의 사진.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對) 테러 작전상 우선순위 표적을 뒤로 제치고 오사마 빈라덴의 아들을 먼저 제거하라고 중앙정보국(CIA) 등을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테러 세력의 위협 수준에 대한 정보당국의 세부적인 분석을 무시하고 그저 유명세를 기준으로 대테러 작전의 표적을 설정한 것이다.

미 NBC방송은 16일(현지시간) 전현직 정보당국 관계자들을 인용해 트럼프 임기 첫 2년간 대통령에게 제거해야 할 주요 테러리스트 명단을 정기적으로 보고했을 때 그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들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당시 명단에는 이슬람 무장단체 알카에다의 수장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 고위급 테러 지도자들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트럼프는 이들보다는 명단의 훨씬 아래쪽에 위치한 젊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9·11 테러를 주도한 빈라덴의 아들, 함자 빈라덴이었다. 한 국방부 관료는 “트럼프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해당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전현직 당국자들은 “당시 함자가 테러를 계획 중이었는지 파악되진 않았지만 미국은 결국 2018년 공습을 통해 그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언론에서 함자의 사망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난해 7월보다도 빠른 시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함자가 미국의 대테러 작전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한 바 있다.

함자가 미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테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빈라덴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함자는 20명의 자녀 중 15째로 알카에다의 젊은 대원들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추앙받는 빈라덴의 아들인데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알카에다의 미래 계승자로 떠올라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미국과 영국의 정보당국 관료들은 “당시 CIA 평가에 따르면 함자는 알카에다의 바로 다음 후계자도 아니었으며 최고 위협요소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알카에다의 현 수장인 알자와히리가 초래하는 위험이 더 시급한 선결과제라는 분석을 제시했음에도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간 트럼프는 자신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더글러스 런던 조지타운대 안보연구소 교수는 “빈라덴의 아들에 대한 트럼프의 집착은 그의 우선순위가 국가의 안보를 위한 더 나은 선택보다는 ‘셀럽’(유명인사) 제거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8년 CIA 재직 시절 고위급 테러리스트 제거 업무 담당 부서를 이끌었던 런던 교수는 정치적인 계산이 트럼프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도 분석했다. 2018년 11·6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들에게 더 선명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정보당국을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