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법관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로 기소된 임성근 부장판사를 무죄로 판단한 1심 재판부의 법리가 같은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사실상 무죄를 선고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심 재판부는 “재판 내용·결과뿐만 아니라 ‘절차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직권남용 혐의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판단했는데, 이는 일제 강제징용 소송의 절차 진행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은 이번 판결에 대해 “재판 개입은 처벌 불가능한 영역이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임 부장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송인권)의 핵심 논리는 “재판 개입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하려면 ‘재판 업무에 관한 직무감독권’이 전제돼야 하는데,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 업무에 관한 직무감독권이 없어 직권남용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용할 직권이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무죄라는 의미다.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에게 사법행정권이 위임된 적이 없고, 설령 사법행정권자라고 해도 법관 독립의 원칙상 재판 업무에 대한 직무감독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구체적으로는 “사법행정권자의 직무감독 대상이 될 수 없는 재판업무에는 기일지정이나 절차 진행과 같은 ‘절차형성행위’도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절차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대목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재상고심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한 뒤, 징용피해자 측 승소로 판단했던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번복하는 등 절차적 방법을 강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서 “(행정처 심의관에게)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절차 진행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하게 하는 등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며 ‘절차형성행위’에 비중을 뒀었다.
재판부는 특히 재판개입 혐의에 대해 “‘위헌적 행위’로 징계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직권남용을 적용하는 것은 확장해석”이라고 판시했다. 이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판결 중 박상옥 대법관의 소수 별개의견을 대전제로 삼은 것이다.
박 대법관은 “공무원의 행위가 위헌적으로 평가된다는 이유만으로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한다면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며 다수의견을 비판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인용해 “추상적 헌법원리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면, 죄형법정주의가 전면적으로 형해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판결문에 썼다. 한 검찰 간부는 이에 대해 “재판 개입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1심에서 대법원 다수의견이 아닌 소수의견에 따라 무죄로 판단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을 항소이유서에 담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합 다수의견은 “(박근혜정부의 좌파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조치에 대해) 헌법의 문화국가원리 등과 이를 구체화한 문화기본법의 이념에 위반해 직권을 남용했다”는 원심(항소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었다. 검찰 관계자는 “직권남용의 보호법익은 국가기능의 공정성이고, 그 공정성이 가장 구현돼야 할 분야가 재판권 행사”라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