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노인들 돈 받지 말라”…中 ‘노인 기부’ 홍보에 비난 봇물

입력 2020-02-11 15:51 수정 2020-02-11 16:07
신종 코로나 방역에 써달라며 20만 위안을 기부한 충칭의 한 할머니 모습.웨이보캡처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신종코로나)이 국가적 재난으로 확산되자 가난한 노인들이 전염병을 극복하는 데 써달라며 거액을 기부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관영 매체들이 이들의 애국심을 적극 부각시키자 “가난한 노인들의 기부를 조장하지 말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신종 코로나 초기 대처를 엉망으로 한 무능한 관리들이 국가적 재난을 초래했으면 국가가 책임을 져야지, 왜 가난한 노인들이 평생 모은 돈을 내놔야 하느냐는 것이다. 국가의 잘못을 가난한 사람들의 애국심으로 덮으려 하지 말라는 비판도 담겨 있다.

11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따르면 충칭에 사는 니쑤잉(87) 할머니는 10일 집 근처 촌(村) 위원회 사무실에 찾아가 평생 모은 20만 위안(3400만 원)을 기부했다. 할머니는 “이 돈은 내가 30년 이상 모은 것”이라며 “지금 이 돈이 가치를 발휘할 때”라고 말했다.

시내 허름한 집에서 혼자 살아온 할머니는 생활 잡화를 파는 좌판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는 것을 아까워할 정도로 늘 절약해왔던 할머니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았다.

할머니는 “국가에 재난이 닥쳤는데, 방관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아들도 “어머니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분이다. 어머니는 전염병 퇴치를 위해 돈을 기부했다. 어머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노인들의 기부를 선전하지 말라'는 해시태그를 단 웨이보 글.

한 네티즌은 웨이보에 할머니 사연을 보도한 인민일보 기사와 사진을 올리며 “정말로 이 할머니가 기부한 돈을 받았나. 미쳤나”라며 “어떻게 가난한 할머니의 돈으로 생색을 내려 하나. 노인을 수탈하는 선전을 중단하라. 진짜 돕고 싶다면 탐관오리를 폭로하라”고 지적했다.

다른 네티즌은 “평범한 노인들, 특히 혼자 가난하게 사는 노인들이 평생 모은 돈을 기부받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며 “우리나라가 이렇게 강하고 큰데, 그들의 돈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 돈은 노인들이 스스로 생명을 지키는 돈이니 갖고 계시라”고 당부했다.

노인들의 기부를 미담으로 소개하며 애국심을 자극하는 보도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不要宣传老人捐款了’(노인들의 기부를 선전하지 말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노인 기부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문구는 11일 웨이보 검색어 상위권을 계속 지켰다.
가난한 노인들이 기부한 사례들 모아놓은 웨이보 글.

최근 중국 관영 매체들은 어려운 노인들의 ‘신종 코로나’ 기부를 적극 보도하며 애국심을 고취해왔다.

중국 관영 CCTV는 93세의 밍모씨가 2만 위안을 국가적 위기 상황에 보태라며 기부한 사연을 직접 밍씨 집까지 찾아가 보도했다. 밍씨는 가진 돈이 1만 5000위안 밖에 없어 기부금이 너무 적다고 여기고 자신의 딸에게 5000위안을 빌려 기부했다.

군인 출신인 밍씨는 “인민들이 처한 어려움은 곧 나에게 닥친 어려움으로 느낀다”며 “기부를 할 수 있게 돼 이제 편하게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청소부로 일하는 위안자오원(68)씨가 “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바치면서 전염병과 싸우는데, 나만 아무런 공헌을 안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기부를 한 사연도 CCTV 전파를 탔다.

랴오닝성 선양에서는 50년간 뻥튀기 장사와 고물 줍는 일을 해온 한 노인이 2만5000위안을 기부했다. 그는 “병원에 물자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방호복과 의료용 장갑 등을 보내고 싶다”며 “내 수중에 돈이 있어 봐야 별로 쓸데도 없다”고 했다.

산둥성 환타이현에 사는 왕모(87) 할아버지는 코로나 방역 현장에 있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마스크나 소독약이라도 사주고 싶다며 1000위안(17만 원)을 기부하려 했으나 할아버지의 곤궁한 삶을 아는 공무원들이 만류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전염병이 지나고 나면, 그 노인들은 무슨 돈으로 살아가느냐” “그 돈은 노인들이 아주 어렵게 번 돈이다. 차라리 연예계 스타들에게 돈 내라고 선전하라” “관영 매체들은 너무 뻔뻔하다. 생활 보장도 안 되는 노인들에게 기부를 하라고 선전하나. 너희들은 왜 한 푼도 기부 안하느냐”는 비난을 쏟아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