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상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92년 오스카 역사를 새로 썼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작품상 수상소감에 등장한 한 여성에게 네티즌의 이목이 쏠리면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왜 봉준호 감독이 아닌 사람이 수상소감을 저렇게 길게 하느냐’는 것이다.
주목을 받은 여성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다.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에 이어 최고권위상인 작품상까지 4관왕을 휩쓴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소감의 대부분을 이 부회장이 이야기하면서다.
이 부회장은 영어로 수상소감을 전하며 “봉 감독에게 감사하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그의 미소, 머리,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과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고 봉 감독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기생충’ 제작진과 동생 이재현 CJ 회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 뒤 “한국 영화를 보러 가주시는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관객들의 의견 덕에 많은 감독과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소감을 끝으로 시상식이 마무리되자 네티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봉 감독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을 질타하는 네티즌들 가운데서도 ‘원래 작품상 수상소감은 제작자들이 하는 게 관례’라는 의견들이 눈에 띄었다. 실제로 지난해 작품상 수상작인 ‘그린북’과 2018년 수상작 ‘셰이프 오브 워터’, 2017년 ‘문라이트’, 2016년 ‘스포트라이트’의 수상소감도 모두 감독보다는 제작자들이 먼저 수상소감을 얘기했다. 이날 ‘기생충’처럼 제작자들만 소감을 말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카의 관례’라는 네티즌의 지적처럼 작품상 수상작의 호명이 이뤄지면 당연하다는 듯 제작자들이 먼저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이야기한다. 감독과 배우, 제작진들은 제작자 뒤로 물러나며 제작자에게 축하를 전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이날 시상식에서도 곽신애 바른손E&A 대표가 먼저 마이크를 잡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기쁘다.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이는 기분이 든다. 이런 결정을 해준 아카데미 회원분들의 결정에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고 말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이 부회장은 ‘기생충’에 제작자가 아닌 책임프로듀서(CP)로 참여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에 이 부회장의 든든한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CJ E&M은 ‘기생충’의 제작사인 바른손E&A와 125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배급도 담당했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 8000여명의 투표를 통해 후보작과 수상작을 정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특성상 회원들에게 영화를 홍보하는 게 매우 중요한데, CJ는 여기에 100억원에 달하는 홍보비용을 지원했다.
이런 탓에 미국의 기업 전문매체 포춘(Fortune)도 일찌감치 이 부회장을 ‘기생충’의 조력자로 분석했다. 포춘은 1월호에 기생충이 K무비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데엔 이 회장과 이 부회장 남매의 영화 사업에 대한 지속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하면서 “미키 리(이 부회장)는 지난 10여 년간 위험하고 혁신적인 영화에 투자하는 데 위험을 무릅썼다”고 강조했다.
CJ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문화 사업에 대한 투자를 줄였는데 CJ는 꾸준히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제작자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왔다”며 “이재현 회장이 사업에 대한 의지와 뚝심을 갖고 투자를 최종결정하면 이 부회장이 전략적으로 실행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정진영 이택현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