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하 신종 코로나) 사태는 중국의 국가 통치 시스템에 대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나 정보를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이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세계의 질병 관련 컨트롤타워인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번 사태 발생 이후 중국을 노골적으로 감싸는 행보를 보이면서 국제기구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지난 3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HO 집행이사회에서 “중국의 조치로 신종 코로나가 더 심각하게 해외로 확산하는 것을 막았다”면서 중국을 칭찬했다. 이날 확진자가 2만명을 넘어서고 사망자가 400명을 넘었는데도 중국을 두둔한 것이다. 되레 그는 대중국 제한 조치를 취한 국가들을 비판했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의 중국 감싸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28일 신종 코로나 확산을 막고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첫 일정으로 전염병 현장이 아니라 시 주석이 있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찾았다. 또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한 시 주석의 조치를 높이 평가했다.
에티오피아 보건·외교 장관 출신으로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WHO 수장인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친중파로 유명하다. 지난 2017년 중국 출신인 마거릿 챈 전 WHO 사무총장이 에볼라 대처 미흡으로 물러난 뒤 그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선거에서 당선됐다. 선거 당시 중국은 앞으로 10년간 600억 위안(약 10조원)을 WHO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간접 지원했다. 중국 외교관들은 그를 사무총장에 선출하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과 지원금을 앞세워 개도국들의 표를 모아줬다.
중국의 지원으로 사무총장에 당선된데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WHO 지원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그가 자금줄인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WHO는 지난 2017년 시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건 실크로드’를 구축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나아가 2017~2019년 연례총회(WHA) 당시 대만을 초청하지 않고 대만 언론의 취재 신청도 거부했다.
WHO만이 아니라 각종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무서울 정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국제기구를 창설한 주역이었던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이후 지원금을 줄이거나 탈퇴한 이후 중국의 입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유엔과 16개 유엔 전문기구들의 수장 자리가 속속 중국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다. 중국은 이들 전문기구 수장 선거에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를 거두고 있다.
지난 2일 블룸버그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 덕분에 중국이 유엔 무대에서 영향력 확대라는 반사이익으로 누린다”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국제평화연구소의 제이크 셔먼 이사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권력 지위가 커짐에 따라 다자 시스템에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미 중국은 높아진 위상을 바탕으로 유엔에서 인권 관련 역할을 축소하거나 유엔을 ‘중국식 국가주도 자본주의’ 논리를 펼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오는 3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수장 선거를 5번째 유엔 전문기구 수장을 배출할 꿈에 부풀어 있다. 현재 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전기통신연합기구(ITU),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의 사무총장이 중국인이다. 신임 WIPO사무총장 후보에 10명 올랐지만 실제 경쟁자는 중국의 왕빈잉 WIPO 사무차장과 다렌 탕 싱가포르 WIPO 청장이다. 오랫동안 기구 내 2인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왕 사무차장은 중국의 영향력이 큰 개발도상국 회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지적재산권의 무차별적인 침해로 악명높은 중국이 WIPO를 장악하면 세계 지적재산권 질서를 크게 어지럽힐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의 마크 코헨 법률기술센터 소장은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왕 차장이 집권할 경우 앞으로 10년 안에 시장 기반의 IP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는 중국이 규칙을 정하는 IP 체제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