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력·장비 지원, 협의도 없이 민간에 선별진료소 종용하는 정부

입력 2020-02-05 11:09
인천에 위치한 가천대 길병원 의료진이 지난달 29일 원내에 설치된 선별진료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의심환자를 분류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신종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선별진료소를 대폭 늘리는 과정에서 민간병원을 일방적으로 선별진료소로 지정하고 업무를 떠맡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전 협의 없이 선별진료소 설치를 강요받은 병원들은 물품·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도에 있는 한 중소규모 민간병원은 지난달 선별진료소로 지정된 지 열흘 만에 취소됐다. 지역 보건소가 별다른 협의 없이 선별진료소 운영을 무리하게 맡겨 병원 측이 철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는 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선별진료소를 운영할 공간이나 검사 키트가 전혀 없어서 운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건소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보건소 측은 “공문으로 협조를 구했는데 이후 살펴보니 선별진료를 할 수 없는 여건이라 지난달 31일 제외했다”고 해명했다.

선별진료소는 응급실이나 의료기관과 별도로 분리해 설치된 진료시설로 신종 코로나 의심 환자를 일차적으로 진찰한다. 정부는 철저한 선별진료를 통한 예방을 강조하며 지난 2일 선별진료소를 기존 288개에서 대폭 늘린다고 발표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선별진료소는 4일 기준 전국에 총 545곳이 설치됐는데 그 가운데 민간병원이 적지 않다.

국립중앙의료원 의료진이 지난 2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의심 환자들을 선별진료소로 안내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민간병원들은 선별진료소 지정 과정에서 보건소가 사실상 강요하듯 통보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몇몇 민간병원은 보건소가 일방적으로 ‘선별진료소를 설치하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했다. 확진자가 발생한 경기도 평택에서 선별진료소를 운영하는 A병원 관계자는 “보건소가 우리 의사를 묻지 않고 공문을 보내왔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환자를 맞았다”고 말했다. 경남의 B병원은 보건소가 공문도 없이 전화로 선별진료소 설치를 지시했다고 전했다.

당장 신종 코로나 진료에 들어가는 인력·물품 등 비용은 민간병원이 도맡는다. 기존 업무에 의심 환자 진료까지 업무가 추가로 늘어난 만큼 병원들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충북의 C병원 관계자는 “선별진료소 운영을 위해 의료인과 비의료인이 함께 근무조를 짜 오전 오후로 나누어 투입되고 있다”며 “인력 부담이 커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경기도의 D병원은 “선별진료소와 관련해 시간제근로자라도 모집하려고 해도 전염병 업무라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선별진료소 설치나 마스크, 손소독제, 체온계, 장갑 등을 마련하는 비용도 대부분 병원 경비로 처리된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에는 정부가 차후에 선별진료소 관련 비용을 일부 보상해줬으나 조건이 까다로워 상당 부분 병원의 손실로 잡혔다고 한다. 감염을 우려한 기존 환자들이 병원을 더 찾지 않는 문제도 있다. 강원에 위치한 E병원 관계자는 “선별진료소가 되면 감염을 의심하는 일반 환자들과 주민들의 반감으로 병원 운영에 어려움이 크다. 어느 병원이나 지정을 꺼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상 상황이라 하더라도 정부가 민간병원에 강압적으로 개입·지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마상혁 경남도의사회 감염병위원장은 “감염병 차단 등 공공의료의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병원에 협조를 구해야지 강제로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의료계 관계자는 “나중에 보건소가 꼬투리를 잡아서 행정처분 등으로 괴롭히면 피곤하니 병원들은 마지못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