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 적용 기준을 높인 대법원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판결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정보 유출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윤종구)는 4일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정보를 불법 조회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의 항소심 선고를 미루고 다음 달 3일 변론을 재개하기로 했다. 재판부가 남 전 국정원장의 선고를 연기한 것은 지난해 12월 17일, 지난달 14일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재판부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변론재개 사유 중 하나로 밝혔다.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과) 채동욱 전 총장 관련 사건과 쟁점이 완전히 동일하진 않지만 공무원의 의무나 권한 등에 관한 일반적인 법리를 담고 있다”며 변호인과 검찰 의견을 추가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 성립한다. 대법원은 공무원이 직권남용한 상대방이 일반인이면 직권에 대응해 따를 이유가 없으므로 곧바로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상대가 공무원일 경우 ‘구체적인 법령이나 직무수행의 원칙 및 기준 등을 위반한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새로이 제시했다.
채 전 총장 혼외자 정보조회 사건에는 직권남용이 아닌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이 적용됐다. 2013년 당시 채 전 총장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강행하려 했다. 이에 남 전 원장과 서천호 전 국정원 2차장 등이 국정원 직원들을 통해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첩보를 검증하라고 지시했다는 게 검찰의 공소사실이다.
재판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채 전 총장 사건의 적용 혐의는 다르지만 사건 구조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최근 공무원 사이, 국가기관 사이, 국가기관과 공공기관 사이 등에서 어떤 기본권 침해가 이뤄지고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는지 등 과거에는 예상 못한 쟁점으로 치열한 논의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채 전 총장 사건과 같이) 상대방 개인정보가 침해됐을 때, 개인정보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는지 국정원의 권한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며 대법 판결을 고려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재판부는 채 전 총장 사건 관련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점도 변론 재개 사유로 밝혔다. 국정원 직원 송모씨가 남 전 원장 등의 지시를 받고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정보를 수집한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에 대한 사건이다. 송씨는 1·2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2016년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아직까지 선고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대법원 선고까지 기다리긴 어려워도 상고이유서나 상고이유 보충서 등을 제출 받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피고인 측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