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놀이터가 제주에 건넨 몇 가지 조언

입력 2020-02-02 17:44 수정 2020-02-02 18:59
지난해 런던의 한 미술관 앞에서 아이들이 대형 비눗방울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정임 기자

런던에서 만난 놀이터

앞에서 우리는 영국의 여러 놀이터를 만났다.

피터 팬 동화를 소재로 한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 그라운드’는 놀이터를 만들 때 어떤 콘셉트를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어른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보여준다. 낯익은 동화나 소설 속 요소가 놀이 공간을 구현하는 주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다. 혹은 지역과 연관된 실제 사건이나 이미지를 놀이터에 재현함으로써 놀이터가 아이들을 넘어 지역민들에게도 소중한 도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다이애나 놀이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2대 놀이터 중 한 곳이다. 한 해 100만명의 어린이와 부모가 이곳을 찾고 있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지방 정부가 지역의 매력도를 끌어올리는 방편으로, 인기 만점의 놀이터를 설계한 사례다. 런던올림픽(2012)이 끝난 후 주 경기장이 있던 런던 동부지역을 살기 좋은 신도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45만㎡에 달하는 넓은 올림픽 공원의 일부로 들어섰다. 도심 한가운데 모험놀이터 등 다양한 여가 시설을 둔 거대한 공원이 추진(2030년 완성)되면서 15년 전만해도 쓰레기 처리장이었던 그곳은 동부지역의 변화를 알리고 새로운 거주민을 유인하는 대표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그동안 한국의 어른들이 소소하게 취급했던 ‘놀이터’가 사실은 도심 재생의 핵심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와 ‘킬번 모험놀이터’는 자연물을 활용한 놀이터 디자인의 좋은 사례다. 자연물을 놀이터의 여러 소재로 활용해 도시 아이들에게 자연의 촉감을 알려주고, 도전과 모험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흔들다리를 건너고 있다. 런던 정부는 2012년 올림픽 후 경기장 치러졌던 올림픽 공원 일대를 개발하면서 재미와 도전 요소를 강조한 모험놀이터를 개설했다. 문정임 기자

홀랜드파크 놀이터. 건축사가 디자인한 이 놀이기구는 걷는 길 하나 특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놀이기구의 다양한 형태는 아이들에게 다른 운동 기능을 요구한다. 문정임 기자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런던 시민들이 사랑하는 놀이터들의 공통점은 뭘까. 결론은 다양성이었다.

놀이터가 들어서게 된 배경과 놀이 공간의 주제가 다채롭다. 크기나 개성도 천차만별이다. 택지개발과정에서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들어선 제주의 놀이터들과는 다른 태생인 셈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성의 차이를 넘어, 놀이 공간에 대한 고민, 놀이의 중요성에 대한 기성세대의 다른 인식을 드러낸다.

켄싱턴 공원에 있는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 피터 팬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피터 팬의 저자는 실제 이 근처에 거주하며 켄싱턴 공원을 자주 찾았다. 방문 당시 비가 와 아이들을 만나기 어려웠지만, 한 해 100만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사진은 해적선의 모습. 문정임 기자

런던의 놀이터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디자인 고안에 따른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다른 곳과 똑같은 놀이터를 기계적으로 카피’하지 않았다. 대지를 네모반듯하게 깎고 고무매트를 덮기보단, 지역에 따라 지형에 따라 가장 매력적인 공간 배치를 찾아냈다. 물이 고이는 지형에 작은 습지를 조성하고,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곳엔 나무 사이를 잇는 자연 구름다리를 설치했다. 피터 팬 작가가 실제 거닐던 공원에 피터 팬 놀이터를 만든 것도 그런 예다.

지역의 특성을 놀이의 재미와 연결하는 작업에는 경험이 많은 건축사와 지역의 아이들, 학부모가 함께했다. 고민과 청취가 색다른 놀이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애정과 시간을 들였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을 말로만 사랑하지 않는 영국의 한 단면이다. 앞서 서술했듯 영국 정부는 놀이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모든 아이에게 놀이의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기 위한 움직임에 착수했다. 그 실질적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최고의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동시에 런던의 놀이터들은 자연물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다. 건축가가 디자인한 놀이시설은 대개 놀이터의 큰 나무를 중심으로 설계됐는데, 아름드리나무는 여름이면 거대한 초록우산을 펼쳐놓는다. 천연 차양막이면서 놀이 공간을 아지트처럼 아늑하게 만드는 가림막의 역할을 한다.

나무를 소재로 한 놀이시설도 주를 이뤘다. 그네 시소 흔들다리는 물론, 모래와 흙 위에도 고목을 얹어 아이들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나무는 철이나 플라스틱보다 관리비가 많이 드는 단점은 있지만, 사계절 아이들이 사용하기에는 여전히 가장 적합한 재료라는 것이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편의성을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방문지에는 영유아용 토들러 놀이터가 구분돼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한국과 비슷한 시설 위주의 놀이터에서 논다. 다만 한국보다 고무매트가 적고 모래가 많이 깔린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대신 5세에서 14세까지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지는 일반 놀이터는 모험과 도전의 요소를 강조했다. 도시의 아이들이 에너지를 소비할 장소가 되어 주는 것이다.

모든 놀이터에는 부모들을 위한 의자가 넉넉히 갖춰져 있었다. 서 있기 지루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채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씻거나 먹을 물이 있는 화장실이 놀이터 가까이 설치된 점도 한국과 달랐다.

관리의 여력이 있는 일부 놀이터에서 입장객을 아이와 부모로 한정하고 있는 점은 이색적이었다. 부모를 동반한 아이만 입장가능 하도록 한 것은 영국 정부 역시 아이들의 안전사고에서 부모와 행정이 책임을 나눠지기 위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더불어 아이를 동반한 어른만 입장만 가능하도록 한 것은, 놀이터를 찾을 이유가 없는 어른들의 무작위 출입을 막아 아이들을 일차적으로 보호하려는 조치다. 영국 역시 한국만큼이나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제재 수위가 높은 나라라는 것이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목소리다. 그런데도 정부가 놀이 공간을 늘리면서 모험과 도전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학부모들의 몇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대의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하고 필요한 놀이 요소라는 확고한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

제주도교육청은 이석문 제주 교육감의 공약 사업으로 제주발(發) 놀이 공간 혁신을 시작했다.

2022년을 목표로 만 3~5세 아이들을 위한 제주유아체험교육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9620㎡의 삼양초등학교 옛 회천분교장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생태체험시설을 짓는다는 구상이다. 틀에 박힌 시설을 벗어나겠다는 각오로 이미 각 분야 전문가로 TF를 구성하고 새로운 디자인 모색에 들어갔다.

동시에 제주남초등학교와 서귀포 위미초등학교에 기적의 놀이터를 만들어 천편일률적인 놀이터들에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더불어 놀이 공간에 대한 교사와 학부모의 고정관념을 줄이기 위해 관련 주제의 교사 연수를 확대하고, 교육청 주최 학부모 강연을 통해 놀이터에 변화가 필요한 이유와 방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활동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석문 제주 교육감은 여러 공식 석상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는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특히 “유아 발달단계에 적합한 놀이 중심의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런던 놀이터들은 작은 미끄럼틀 하나를 설치할 때에도 나무를 중심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문정임 기자

바너드 모험놀이터. 이 곳은 모험의 요소를 극대화하고 일부 시설을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 문정임 기자

전문가들은 놀이공간의 용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올라가는 형태의 그물망 아래에 완충역할을 하는 낙엽과 나무조각이 깔려 있다. 문정임 기자

제주가 나아갈 방향

그렇다면 제주의 놀이 공간에는 재미와 도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런던 현지에서 만난 놀이터 전문가들은 몇 가지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먼저 아주 작은 자투리땅의 놀이터는 아이들이 주민들을 방해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기에 부적절하다. 최근 제주에서는 놀이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자투리땅을 놀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놀이시설을 만들 때 자투리땅에 집약적인 놀이시설을 갖추는 것보다 놀이와 휴식, 여가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넉넉한 대안 시설로 조성하는 편이 가족 간 이동과 민원 최소화 등의 측면에서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놀이 공간 조성은 반드시 용지 매입에서 출발할 필요는 없다. 이미 지가가 오랫동안 상승해 온 시점에서 사유지를 사려면 비용이 증가하고, 공유지를 활용하려하면 찾기가 힘들다. 절대적으로 공간이 부족한 도심에서는 일시적 공터에 시공과 해제가 쉬운 놀이기구를 설치해 놀이터를 1~2년 단기 운영하거나, 5~10년 장기 임대하고 토지주에 임차료 외에 세금 혜택 등을 주는 방식도 권장된다.

놀이터를 만들 때 어른들은 구획 정리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수평화 작업에는 돈이 많이 들고 재미는 줄어든다. 경사면은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놀잇감이 된다.

‘바닥=고무매트=안전’의 공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놀이 공간에는 다양한 놀이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바닥이 필요하다. 만들기를 하는 공간에는 모래나 점토가 포함된 바닥이 좋고, 넘어졌을 때 완충작용이 필요한 놀이 공간에는 콩 자갈이나 나무껍질 조각이 적합하다. 뛰고 달리는 곳에는 다진 흙바닥이나 잔디가 좋다. 인라인스케이트 등을 타게 하거나 사방치기 등의 놀이를 할 때에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바닥이 적합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색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런던에서 만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 기구에는 이런 특성이 없었다. 모양도 마찬가지다. 동물 모양의 놀이기구는 첫눈에 아이들의 호기심을 사지만, 얼마 안 가 아이들은 싫증은 낸다. 대개 겉보기 보다 훨씬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물, 특히 나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준다. 바람과 날씨 변화를 막아주는 보호막이고, 풍부한 상상력의 공간이 된다. 놀이터의 나무는 자체가 놀이 대상이 되기 때문에, 튼튼하고 생장 속도가 빠르며 왕성하게 번식하는 수종이 좋다.

놀이 공간에서 생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관리만 가능하다면 생태습지, 연못, 텃밭 등이 아이들이 자연과 환경문제를 이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놀이시설을 디자인으로써 고안할 필요가 있다. 조합 놀이대와 같은 주문 완제품이 아니라 아이들이 매달리고 흔들리고 균형을 잡는 등 힘으로 움직여 공격성을 해소할 수 있는 놀이시설의 형태를 고민해야 한다. 이때 부지의 특성(경사도, 나무, 흙 등)과 주 사용층, 주택과와의 거리(소음) 등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예를 들어 그물을 타고 오르는 기구는 유아부터 초등, 청소년, 성인까지 여러 연령층이 즐길 수 있고, 특히 인구 고밀도 도시 지역에 사는 아이들에게 분출구 역할을 해 주는 기능이 있다. 회전 놀이기구는 아이들에게 속도와 원심력을 알게 하고 운동에너지를 소비하게 한다. 런던에 특히 자주 만났던 집 놀이는 사는 집이 좁고 주변에 몸을 숨기거나 쉴 수 있는 자연이 부족한 지역의 아이들에게 적합하다. 물놀이의 경우 가장 기본적인 놀이형태지만, 황량한 도심에서는 좀처럼 체험하기 어려운 형태의 놀이기도 하다. 물장구치기, 진흙으로 모양 빚기 등은 아이들의 원초적 욕구이기도 하다. 이처럼 놀이기구는 아이들이 평소 주위에 있는 물건으로는 할 수 없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놀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놀이는 가장 기본적인 놀이 형태지만, 도심에서는 좀처럼 체험하기 어려운 형태의 놀이이기도 하다. 방문한 런던 놀이터들은 인공 계곡 형태의 물 놀이 공간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문정임 기자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변화의 액션 취해야

어른들은 놀이를 진지하지 않은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놀이를 위한 별다른 배려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 놀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웠는지를 상기하면, 놀이가 한 아이의 성장에서 갖는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놀면서 자란다. 에너지를 발산하고 운동기능과 균형감각, 조정력을 키운다. 친구와의 사회적 활동을 통해 성격을 형성하고,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 새로운 과제에 대응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놀이는 아이들의 미래의 삶을 위한 소중한 ‘총연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주에는 190여개 학교놀이터와 200곳이 넘는 동네 놀이터가 있다. 모두 비슷한 모양이다. 고무매트와 조합 놀이대, 알록달록 페인트. 우리는 그동안 누구를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온 것일까. >끝<

※ 이 기사는 제주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이뤄집니다.

런던=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