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는 경기를 마친 뒤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만나면 그날 몇 쿼터 몇 분경에 양 팀이 어떤 플레이를 주고받았는지 정확하게 읊어낸다고 한다. 때로는 몇 년 전 경기까지도 그렇게 기억해낸다고 한다. 천부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에도 비슷한 선수가 있다. 담원 게이밍 ‘너구리’ 장하권이다. 르브론 제임스처럼 모든 경기 내용을 기억해내지는 않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확연히 많은 내용을 선명히 복기해낸다.
여기에 장하권은 남다른 게임 눈썰미까지 갖고 있다. 그는 선수가 어느 챔피언으로 어떤 룬과 아이템 트리를 선택했는지를 잘 기억해낸다. 더불어 각 아이템 트리의 이점과 약점은 무엇인지도 잘 캐치해낸다.
최근 담원 연습실에서 장하권을 만났다. 먼저 개막한 중국 ‘LoL 프로 리그(LPL)’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비시 게이밍(VG)과 비리비리 게이밍(BLG)의 경기에서 ‘킹겐’ 황성훈이 카밀로 모데카이저를 상대하는 방법이 인상 깊었다는 것이다.
카밀과 모데카이저가 탑에서 만나면 보통 모데카이저가 주도권을 잡는 구도라고 한다.
“제 기억에 아마 VG가 지기는 했을 거다. 그런데 황성훈이 ‘수은장식띠’를 빠르게 가는 게 인상 깊었다. 원래 카밀은 ‘티아맷’을 먼저 사야 한다. 그걸 늦게 사더라. 대신 ‘삼위일체’ ‘수은장식띠’ 순으로 아이템을 구매해 모데카이저로부터 선 푸시 주도권을 빼앗았다. 치고 빠지는 식으로 대미지 교환을 한 뒤 궁극기는 수은장식띠로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는 예전에 황성훈의 솔로 랭크 게임을 관전했을 때에도 비슷한 그림을 봤다고 했다.
“솔로 랭크에서 황성훈이 ‘정복자’ 대신 ‘착취의 손아귀’와 ‘깨달음’ 룬을 선택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삼위일체를 사면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40%로 맞춰지더라. 빠른 쿨타임을 이용해 아웃복서 스타일로 모데카이저를 잡는 걸 봤다. 대회에서도 그러더라. 모데카이저가 라인을 건드리면 툭툭 치고, 궁극기는 수은장식띠로 푸는 거다. 보고 있으면 약 오른다.”
이론이 빠삭한 프로게이머가 장하권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장하권처럼 매번 패치 노트를 읽고, 다른 팀 탑라이너들의 솔로 랭크 게임을 관전하며 그들의 플레이 스타일까지 연구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장하권은 ‘내추럴’ 후 자러(도미너스)나 ‘빈’ 첸 저빈(쑤닝)같이 기자들도 잘 모르는, LPL 골수팬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신인급 선수들까지도 빠삭하게 꿰고 있다. 두 선수는 요즘 장하권이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LPL 탑라이너들이다. 그는 ‘빈’이 ‘러브 카밀’이란 소환사명으로 한국 서버 솔로 랭크 게임을 했을 때부터 주의 깊게 봤다고 했다.
룬 연구도 꾸준하게 하는 선수다. 트레이드마크였던 ‘도벽’ 룬이 사라져 아쉽다는 장하권은 요즘 ‘마법의 신발’ 룬과 블라디미르 룬 연구에 빠져있다. 그는 “늘 하는 말이지만 룬은 라인전을 보고 찍어야 할지, 후반전을 보고 찍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의 교전 능력이 많이 약해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룬이나 아이템 변화를 줘보면 어떨까 싶다. 룬을 조금만 바꿔도 게임 내에선 많은 변화가 생긴다. 정복자와 착취의 손아귀 중에 고민 중인데, 정복자를 든다면 보조 룬으로 ‘지배’와 ‘영감’ 중에선 무엇이 더 나을까도 생각이 많다.”
“‘난입’은 후반전을 보는 룬이다. 라인전이 힘들 때가 많다. 저만 힘든 건 괜찮은데 팀원들에게도 부담을 주는 게 문제다. 아칼리는 라인전이 약해도 교전에 강하지 않나. 블라디미르는 라인전도 약한데 교전에서도 활약하기가 어렵다. 내가 성장할 때까지 팀이 너무 힘들어한다. 그래서 ‘봉인 풀린 주문서’ 룬 같은 것도 연구해보고 있다.”
이런 디테일한 내용을 기사에 실어도 되는지 묻자 그는 “어차피 내 솔로 랭크 전적 보면 다 나온다”며 흔쾌히 허락했다. 지난해 장하권은 후퇴를 모르는 라인전 스타일 덕분에 ‘여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포를 연기하는 조조 같다. 화끈할 것 같지만 침착하고 영리하다. 호방해 보이지만 철두철미하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