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김기춘 사건 파기환송 왜?… ‘의무없는 일’이 관건

입력 2020-01-30 17:10 수정 2020-01-30 18:18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일부 행위에 대해 법리 오해가 있다며 2심 재판을 다시 하도록 했다. 직권남용죄 구성 요건 중 ‘의무가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 다시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심리 미진과 법리오해를 이유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 전 실장 등은 박근혜정부 시절 좌파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 명단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다.

형법 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한다. 그동안 ‘직권’ ‘남용’ ‘의무’ 등 단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 법적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전원합의체는 김 전 실장 등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을 통해서 실제 지원 배제가 이뤄지도록 지시한 것은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수의견을 낸 11명의 대법관은 “김 전 실장 등이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각종 사업에서 정부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다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각종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는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원합의체는 이번 판결에서 처음으로 직권남용죄 구성 요건인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의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대법관들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지시를 받는 쪽)이 공무원이거나 공공기관 임직원인 경우에는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서로 간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협조하는 등의 행위를 법령상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대법원 판단은 공무원 간 직권남용이 쟁점이 된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각종 재판 개입·인사 불이익 문건을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작성시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를 받는다. 그의 공소장에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표현이 76차례 등장한다. 대법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일부 혐의에서 ‘의무 없는 일’의 해당 여부에 대한 구체적 판단이 없었던 점을 파기환송 사유로 든 만큼, 양 전 대법원장 사건에서도 심의관들의 보고서 작성 행위가 법령이나 사법부 내 업무기준 등에 위배된 것인지를 집중 심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재판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유사하다. 검찰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박근혜정부에서 임명된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한 행위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김 전 장관 측은 “‘사직서 제출 요구’는 인사발령과 다르다. 의무 없는 일이 되려면 인사권의 법률적 효과로 사직 결과가 나와야 한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 무마 의혹 사건에 영향을 미칠 지도 관심사다. 조 전 장관은 민정수석 시절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 등에게 감찰을 중단시켜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조 전 장관 측은 감찰 처리에 정무적으로 미흡한 점이 있었더라도 법적 책임은 없다는 전략으로 갈 것”이라며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놓고 검찰과 격돌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2018년 2월 김 전 실장 등 사건을 소부 2부에 배당했다가 같은 해 7월 전원합의체로 넘겨 1년 6개월간 심리해왔다.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1심 재판부가 무죄로 봤던 부분(1급 공무원 사직 강요 혐의)까지 유죄로 판단돼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상은 구자창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