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손아귀서 벗어나려는 우크라, 러와 2차대전 책임 공방

입력 2020-01-29 18:20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제2차 세계대전 개전의 책임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친(親) 서방 노선을 추구하는 우크라이나와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을 추구하며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러시아 사이 신경전이 역사전쟁의 모습으로 발현된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5주년을 맞아 폴란드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해 “폴란드 국민들은 두 전체주의 체제의 담합의 결과를 가장 먼저 경험했다”며 “담합은 2차 대전으로 이어졌고 나치가 홀로코스트라는 죽음의 수레바퀴를 가동하도록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라는 두 전체주의 국가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이 나치의 침공을 가능케 만든 만큼 독일과 소련 모두에 개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1939년 모스크바에서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조약에는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독일과 소련이 양분하는 내용의 비밀 조항이 포함됐다. 조약으로 동쪽 소련의 공격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 독일은 곧바로 서쪽으로 진격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의 문을 열었다. 젤렌스키의 발언은 러시아에도 2차 대전의 책임을 물리려 애쓰고 있는 폴란드의 방침에 동조하는 것이다. 과거 소련으로 함께 묶였던 러시아와 거리를 두며 친 유럽연합(EU)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대외정책 기조의 연장선에 놓인 발언이기도 하다.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역사를 ‘러시아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 사회를 구했다’고 포장하고 있는 러시아에게는 이는 체제 정당성을 공격하는 발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 세력은 자신들의 과두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러시아 경제침체가 길어지자 책임을 외부 가상의 적으로 돌리는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논리 속에 EU 등 서방세계를 러시아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했다. 서구의 부패, 유럽 사회의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의 음모에 맞서 러시아를 지키고 유럽 사회를 다시 구해낸다는 내용의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현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2차 대전의 승리를 자신들이 주도한 자랑스러운 역사로 포장하기 위해 당시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에 대한 복권 운동도 진행 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젤렌스키의 발언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8일 해당 발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파시즘으로부터 폴란드와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천만명의 러시아인들과 독립국가연합(CIS·옛 소련국가 모임) 소속국 국민들에게 모욕을 주는 주장에 동조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하원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레오니트 슬루츠키도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숨진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 같은 발언은 피의 전쟁을 어깨를 맞대고 승리로 이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참전 용사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