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정부가 자국민의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 여행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AP통신 등은 26일(현지시간) 아르예 데리 이스라엘 내무장관이 성명을 통해 “종교적인 이유와 투자·회의와 같은 사업상 이유로 최대 9일 간 사우디 여행을 허용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사우디 등 걸프 지역 이슬람 국가들과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불가침조약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에 이은 유화적 제스처다.
그동안 이스라엘 국적자가 사우디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외교관이 쓰는 관용 여권을 사용하거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번에 무슬림인 이스라엘 국적자가 성지 순례를 위해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가거나 최장 9일 이내로 사우디 측에서 초청받아 사업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에는 사우디 여행을 허용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조치가 성사되려면 사우디 정부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사우디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자국민의 이스라엘 방문 뿐 아니라 이스라엘 국적자의 입국도 허락하고 있지 않다. 현재 아랍연맹 22개국 중 이집트와 요르단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며 건국한 이래 지금까지 아랍 영토인 팔레스타인을 강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정부는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발표에 대한 논평에 응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사우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을 매개로 물밑에서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사우디는 팔레스타인을 지원하는 등 이스라엘과 숙적 관계였지만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협력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만 양국의 관계 개선 정황이 드러날 때마다 이슬람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부인해 왔다.
반면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걸프 지역 국가들에게 구애하고 있다. 사우디 등 이슬람 순니파에 속하는 걸프 지역 국가들이 이슬람 시아파 맹주 이란에 위협을 느낀다는 점에서 이스라엘과 공감대가 있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지난 2019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오만을 방문해 카부스 빈사이드 국왕과 회담하는가 하면 올해 4월에는 UAE 두바이에서 열릴 세계 엑스포(EXPO)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스라엘 정부가 걸프 지역 국가들과 불가침조약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들 국가들과의 공감대가 없으면 나오기 힘들다. 실제로 이스라엘 카츠 이스라엘 외교장관은 지난해 10월 트위터에 글을 올려 “최근 나는 미국의 지원 아래, 아랍 걸프 국가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런 역사적 조처는 평화협정 체결 이전까지 분쟁을 끝내고 민간 협력을 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카츠 외교장관은 구체적인 계획안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유엔 총회에서 이런 계획을 아랍권 외교장관들과 제이슨 그린블랫 백악관 중동 특사에게 제시했다”며 당사자 간 논의가 진행 중임을 밝혔다.
이스라엘의 이번 사우디 여행 허가 조치는 오는 28일 네타냐후 총리와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제1야당 청백당의 베니 간츠 대표가 트럼프 대통령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중동 평화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직전 나와 더욱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중동 평화 구상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AP통신은 “미국의 중동 평화 구상에 대한 사우디의 지지는 이스라엘의 여행 허용 조치에 상당한 추진력을 줄 것”이라며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강경한 반대 입장을 감안할 때 사우디가 그렇게 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분석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