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주목·밝은 라임 나무로 인공 색칠 않고 놀이기구 설계

입력 2020-01-20 00:09 수정 2020-01-22 14:39
킬번 모험놀이터는 도심 주택가와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사진 왼쪽 검은 철문이 킬번 그랜지 공원 출입구다. 문정임 기자

놀이 정책의 선진국, 영국의 놀이 공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해 11월 런던을 찾았다. 영국은 2008년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한 후 아이들에게 평등한 놀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본 지는 ‘애비 오차드 커뮤니티 가든’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 ‘킬번 모험놀이터’ ‘홀랜드파크 모험놀이터’ ‘바너드 모험놀이터’ ‘바터시 놀이터’ 등 10여 곳을 방문했다.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개성 강한 몇 곳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기사를 읽는 내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과 13년 전만 해도 영국은 세계 선진국 중 아동복지 분야 점수가 최하위였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만큼이나 덜 걷고 실외놀이를 할 기회가 적었으며 어른들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고 있었다.

놀이터 설계를 맡은 에렉 건축사무소는 인근 초등학생들의 의견을 물어 디자인에 반영했다. 물방울 모양의 나무 집은 그물이나 줄, 미끄럼틀 등으로 지면과 연결돼 있다. 문정임 기자


건축가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나무의 색상 차이를 이용해, 인공 색을 바르지 않고도 나무 구조물이 갖는 외적 단조로움을 덜어냈다. 문정임 기자


킬번 모험놀이터는 자연 물질의 촉각을 느끼는 영역과 모험 영역으로 구분된다. 문정임 기자

진정한 도심형 놀이터

킬번 모험놀이터는 런던 중심부 캠든(Camden) 자치구의 킬번그랜지공원(Kilburn Grange Park)에 자리해 있다. 앞서 소개한 홀랜드 파크보다 공원 규모는 훨씬 작지만, 주택가 인도에서 다섯 걸음만 들어가면 바로 놀이기구를 만질 수 있는 최단 도심형 놀이터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킬번 모험놀이터는 긴 삼각형 모양의 공간을 절반은 자연적 요소로, 절반은 도전과 위험이 있는 모험놀이터로 꾸몄다. 아빠 품처럼 큰 나무들이 놀이터에 천연 가림막이 되어주고, 그 아래 작은 잔디 언덕들 사이로 모래밭과 바위 밭이 곳곳에 배치됐다. 바닥에 대(大) 자로 누운 큰 고목은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부엌이자, 평균대의 기능을 한다.

모험의 영역으로 가면, 아이들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긴 줄에 몸을 실어 높은 나무집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나무로 2층, 3층 쌓은 구조물은 성벽처럼 근엄하다. 그러나 나무 설치물은 미끄럼틀 계단 정글짐 줄 등 다양한 것들로 지면과 연결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나이와 신체적 발달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모험 구조물은 나무의 본래 색상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만들었다. 어두운 주목나무와 밝은 라임나무, 그리고 덤불의 특성을 살려 인공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고도 색상을 가진 것처럼 조합해냈다. 바닥에는 시설물의 특징에 따라 고무매트와 흙, 자갈, 나뭇조각이 다양하게 깔려 있다.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땐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놀이터 관계자는 “모래를 갈고, 미끄러운 곳에 낙엽을 쓸고 있다”며 “날씨가 좋을 때는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아이와 부모들이 이곳을 가득 메운다”고 전했다.

킬번 모험놀이터는 '도전'적 요소와 '자연'적 요소를 가미한 형태로 2009년 만들어졌다. 이 곳의 형태는 이후 런던 놀이터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문정임 기자

아이들과 함께 설계를

킬번 모험놀이터는 2009년 조성됐다. 영국 정부가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해 본격적인 놀이 기회 보장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무렵이다. 텀블링 베이와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를 설계한 에렉 건축의 또 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건축가들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모험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표현해보도록 요청하면서 놀이터 설계에 착수했다. 공원 동쪽에 있는 킹스게이트 초등학교(Kingsgate Primary School) 학생들을 파트너로 참여시켰다.

킬번 모험놀이터는 기존의 지형을 살리는 데에서 출발했다. 해당 부지에는 원래 빅토리아 시대의 수목원이 있어서 다 자란 나무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건축가들은 나무의 원래 자리를 최대한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무를 중심으로 놀이 시설을 배치했다.

이곳은 영국왕립건축가협회상 등 여러 상을 받으며 런던 곳곳에 자연과 모험적 요소를 가미한 놀이터를 늘려나가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런던=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