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한 땅은 습지, 경사진 곳엔 집라인… 문제 지형을 놀이 요소로

입력 2020-01-19 13:12 수정 2020-01-22 14:41
놀이 정책의 선진국, 영국의 놀이 공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해 11월 런던을 찾았다. 영국은 2008년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한 후 아이들에게 평등한 놀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본 지는 ‘애비 오차드 커뮤니티 가든’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 ‘킬번 모험놀이터’ ‘홀랜드파크 모험놀이터’ ‘바너드 모험놀이터’ ‘바터시 놀이터’ 등 10여 곳을 방문했다.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개성 강한 몇 곳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기사를 읽는 내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과 13년 전만 해도 영국은 세계 선진국 중 아동복지 분야 점수가 최하위였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만큼이나 덜 걷고 실외놀이를 할 기회가 적었으며 어른들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고 있었다.

홀랜드 파크는 런던 32개 자치구 중 이너런던에 속하면서 런던 최고 부촌인 켄싱턴·첼시(Kensington·Chelsea) 구에 자리하고 있다.

켄싱턴 하이 스트리트 역이나 노팅힐 게이트 역에 내려 15분쯤 걸으면, 상점가들 사이로 검은 철문이 보이는데 그 곳이 공원 입구다. 문정임 기자

17세기 영국 어느 귀족 성의 근거지였던 홀랜드 파크는 넓이가 22만㎡에 달한다. 문정임 기자

아름드리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놀이 기구를 설계했다. 문정임 기자

걸어가는 길의 형태도 다양하다. 문정임 기자

10명이 탈 수 있도록 고안한 놀이 시설. 문정임 기자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그네. 문정임 기자

놀이기구 하나에 담긴 고민

홀랜드 파크(Holland Park)는 런던 32개 자치구 중 중심부인 이너런던에 속하면서, 런던 최고 부촌인 켄싱턴·첼시(Kensington·Chelsea) 구에 자리하고 있다. 켄싱턴 하이 스트리트 역이나 노팅힐 게이트 역에 내려 15분쯤 걸으면, 상점가들 사이로 검은 철문이 보이는데 그곳이 공원 입구다. 입구에서 서쪽을 향해 올라가면 살짝 숨이 가빠올 때쯤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를 만난다.

놀이터는 입구에서 안으로 갈수록 내리막길인 비탈 지형이다. 그 안은 목재로 만든 각종 놀이시설과 흙, 모래를 채워 넣었다. 이곳을 찾았을 때, 집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사진 지형을 따라 길게 들어선 탓에 실제 길이는 25m인데, 내려오면서 느끼는 짜릿함은 두 배다. 매달려 흔들리기는 아이들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다. 아이들은 줄에 매달려 자신의 몸무게를 팔 힘으로 버티면서 중력과 논다. 최근에는 집라인, 꼭짓점 그네, 육각형 그네 등 다양한 놀이시설이 이러한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데, 홀랜드 파크 놀이터는 집라인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놀이터에서 가장 큰 아름드리나무의 주변으로는 복합놀이기구를 설계했다. 늘이면 족히 수십 미터가 될 법한 나무 길이 구불구불 미로처럼 얽혔다. 오르고 내리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색다른 길’들의 조합이다. 어떤 길은 긴 나무판을 넓은 브이자 형태로 붙였고, 외나무다리 길도 있다. 발 크기만 한 통나무를 세운 징검다리 길도 있다. 다른 모양은 다양한 신체 능력을 요구한다.

10인용 시소와 10인용 그네도 으뜸 인기 종목이다. 여럿이 앉을 수 있어 다음 아이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릴 필요가 없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와야 비로소 놀이기구가 꽉 채워지니,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친구들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 경쟁과 이기심을 조장하는 놀이기구가 아니라 함께 해야 더 빛나는, 세상의 이치를 말해주는 디자인인 셈이다.

한쪽으로는 물이 구렁을 따라 내려오는 인공 간이 계곡이 보인다. 그 옆으론 작은 습지가 조성됐다. 이곳은 단순한 물놀이의 재미를 넘어, 어린이들이 물가에 사는 생물들을 보면서 서식지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늪지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비가 땅으로 흡수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한 여정으로서 조성했다. 습지에 사는 생물들을 통해 서식지의 개념도 알게 한다. 문정임 기자

에렉 건축사무소가 이 놀이공간에 접목한 배수 시스템 구상도. 켄싱턴&첼시 구청 홈페이지에서 발췌.

기존의 비탈 지형은 굳이 평탄화하지 않고, 이처럼 물이 흐르는 길목으로 조성했다. 문정임 기자


문제 지형을 놀이와 학습의 요소로

켄싱턴·첼시 구는 2019년 7월 놀이 공간을 재개장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사랑받는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인 변화를 고안한다. 설계를 맡은 에렉 건축사무소(Erect Architecture)는 디자인을 확정하기에 앞서 인근에 사는 여러 연령대의 주민들에게 어떤 놀이 시설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집라인과 등반용 큰 그물, 미끄럼틀, 매달리기 줄 등이 우선순위에 꼽혔고 이를 디자인에 충실히 반영했다.

켄싱턴·첼시 구에 따르면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는 삼림지대 주변과 연계된 고품질의 놀이 경험을 제공하고, 이전에는 침수되기 쉬웠던 현장의 배수를 개선하기 위한 방식으로 재설계됐다. 질퍽질퍽한 운동장은 오염도를 높이고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구는 그러나, 놀이 공간의 배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설비 개선에만 방점을 두지 않았다. 동시에 이것이 독특한 놀이 경험을 제공되는 방안을 고민했다. 디자인 팀은 비가 고이는 경로를 여러 곳으로 분산해 홍수의 위험을 줄이는 한편, 고인 물이 흘러 연못으로 가고, 다시 땅속으로 스며드는 일련의 과정을 아이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습지와 같은, 소박한 장치를 마련했다.

놀이 전문가들은 놀이 공간에서 생태 공간을 만들어두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말한다. 생태습지, 연못, 텃밭 등은 아이들이 자연과 환경문제를 이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공간이다. 습지를 중심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자연이 만든 놀이 공간이 되고, 물속이나 풀밭에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는 놀이 길인 동시에 놀이 도구가 된다.


부모들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종용하지 않도록 충분히 긴 의자를 만들었다. 문정임 기자

곳곳엔 아이들을 위한 배려가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는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배려를 숨겨두었다. 우선,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이처럼 다양한 놀이 기구를 구상한 것부터가 아이들에게 지루하지 않은 놀 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25m 집라인에서 모래밭까지. 어른들이 고민하며 얹은 다양한 놀이요소들은 폭넓은 연령대의 아이들을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놀이 재료만큼 어른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충분히 갖췄다. 이는 부모가 편하지 않은 장소에서 아이들이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좋은 놀이터의 조건 중 하나가 어른들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외부로 이어지는 주차장을 놀이터 바로 옆에 마련해, 부모들이 아이를 데려오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모험놀이터 인근에는 영아를 위한 토들러 놀이터를 따로 조성했다. 아이들이 나이에 따라 놀이 공간을 사용하는데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토들러 놀이터는 물론 모험놀이터 안에도 쾌적한 어린이용 화장실을 만들어, 아이들이 놀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놀이 공간을 빠져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었다.

오래전 귀족 성의 근거지였던 홀랜드 파크는 넓이가 22만㎡에 달한다. 야생 생물이 풍부한 삼림지대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정원과 각종 스포츠 시설이 다양하게 갖춰져, 인근 주민은 물론 런던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공원 앞은 번화한 런던 도심으로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은 제한됐다.

홀랜드파크는 오전 7시30분부터 일몰 30분 전까지 상시 개방하고 있다. 누구든 이곳으로 가면 자연 속에서, 혼자 또는 무리 지어 즐거운 모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런던=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