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종신 독재 체제 수립을 향한 발걸음을 뗐다. 푸틴 대통령이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을 제안하자 러시아 내각과 푸틴의 오랜 우방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기다린 듯 총사퇴하며 길을 터줬다. 2016년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 대선에 연달아 개입하며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푸틴 중심 러시아 집권세력의 권력 연장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더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15일(현지시간) 자신을 포함한 러시아 내각이 총사퇴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이 앞서 신년 국정연설에서 내놓은 개헌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다. 푸틴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에 집중돼 있는 권력을 의회로 대폭 이양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총리와 내각 장관 선출 권한을 의회로 옮겨 실권이 대통령에서 총리로 이동하도록 했다.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고 있는 러시아 헌법 상 이미 연임 중인 푸틴은 오는 2024년 퇴임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을 대폭 줄여 퇴임 후에도 실세 총리 등의 형태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직책명만 바뀐 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권력 연장 꼼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2008년 4년 임기 대통령직을 연임한 그는 당시에도 3연임 금지 조항에 막혀 총리로 물러났고 최측근인 메드베데프가 차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메드베데프 정부는 ‘상왕 푸틴’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정부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푸틴은 2012년 대선에 출마해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대통령직에 복귀했고 매드베데프를 총리에 임명했다.
푸틴의 첫번째 꼼수와 이번 개헌 추진의 다른 점은 통치 자문기구인 러시아 국무원 권한 강화에 있다. 현재 러시아연방 지역 지도자 등으로 구성된 국무원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아주 효율적인 기관이라는 것이 입증됐다”며 헌법 개정을 통해 국무원의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정치 분석가들을 인용해 “변화된 국무원은 대통령 퇴임 후 푸틴이 군과 외교 영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하도록 돕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전례도 있다.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모델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9년 장기 집권 후 지난해 3월 퇴임했지만 여전히 카자흐스탄에서 ‘인민의 지도자’ 직함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국가안보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늘린 후 그 자신이 종신 위원장에 오르는 방식으로 독재를 공고화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푸틴 대통령이 ‘카자흐 모델’을 따라갈 수도 있다고 전했다.
푸틴은 메드베테프 총리 후임으로 국세청장 미하일 미슈스틴을 지명했다. 이 역시 독재 완성을 위한 포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미슈스틴을 총리로 임명해 권력 분산을 막으려는 목적이다. 푸틴의 측근 인사들은 FT에 “푸틴은 단 한 번도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푸틴은 2012년 재집권 후 독재체제에 대한 내부 불만이 높아지고, 러시아 경제침체가 길어지자 그 책임을 외부 가상의 적으로 돌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러시아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했고, 유럽연합(EU) 등 서방세계는 독립된 민족국가 단위로 분열시킨다는 대외전략을 유지해 왔다. EU 해체를 주장하는 유럽 각국의 극우 세력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등 최근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고 의심받는 일련의 사건들은 서구 통합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미 CNN은 “푸틴의 힘이 러시아에서 확대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푸틴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더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