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관세폭탄 투하를 시작으로 약 18개월가량 이어진 무역전쟁이 공식 ‘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합의를 “미국의 승리”로 치켜세우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전 세계에 유익한 합의”라고 평가하는 등 양측은 겉으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민감한 현안들은 2단계 협상 의제로 미뤄놓은데다, 트럼프 대통령은 2단계 협상이 끝나야 추가적인 관세 철회가 가능하다고 밝혀 언제든 숨겨진 뇌관이 터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중국 측 고위급 무역협상 대표인 류허 부총리와 1단계 무역 합의문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 대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으로 미국 노동자와 농민, 가족에게 경제적 정의와 안전의 미래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이전에 중국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중요한 발걸음을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경제와 정부의 승리”라도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류허 부총리가 대독한 친서를 통해 “양측은 더 큰 진전을 이루기 위해 무역 협정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며 “이번 합의는 중국과 미국, 전 세계에 유익하다. 미국이 중국 기업들의 무역 및 투자 활동을 공정하게 대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단계 합의문 서명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3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부과 행정명령에 서명한 지 22개월 만에, 관세 부과를 시작한 지 18개월 만에 미·중은 잠시 휴전 모드로 접어들었다.
양국 합의문은 총 90여 쪽 분량으로 지식재산권, 기술이전, 농산물, 금융서비스, 거시정책·외환 투명성, 교역 확대, 이행 강제 메커니즘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중국의 미국산 상품 구매다.
중국은 2017년에 비해 2년간 2000억 달러(231조7000억 원) 규모의 미국산 제품을 추가 구매하기로 했다. 첫해에 767억달러, 두 번째 해에는 1233억달러어치를 추가 구매하기로 했다. 2017년 미국의 대중국 상품·서비스 수출 규모는 1860억달러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올해 2630억달러, 내년 309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상품을 수입해야 한다.
세부적으로는 공산품 777억달러, 농산물 320억달러, 에너지 524억달러, 서비스 379억달러 등이다.
2017년 구매 규모가 240억달러였던 중국산 농산물은 올해 125억달러, 내년 195억달러를 추가 구매해 2년간 총 800억 달러를 구매하게 된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예정됐던 중국산 제품 1600억달러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고, 12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에 부과해온 15% 관세를 7.5%로 줄이기로 했다. 다만 2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에 부과해온 25% 관세는 그대로 유지한다.
중국은 외국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 강요 금지, 기업 비밀 절취 처벌 강화, 지식재산권 보호, 중국 금융시장 개방 확대, 인위적인 위안화 평가절하 중단 등을 약속했다.
미국은 중국이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행 강제 메커니즘’에 따라 90일 이내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중국은 보복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이 이행 의지와 상관없이 2017년에 1860억달러였던 미국산 구매를 한해 평균 1000억달러씩 늘리는 게 가능할지 미지수다.
특히 농산물의 경우 2017년 한해 240억달러를 구매했는데 2년간 320억달러를 추가로 수입하라고 하면 닥치는대로 사서 쌓아둬야 할 수도 있다. 또 미국 농민들이 그렇게 많은 물량을 제때 공급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게다가 향후 시작될 2단계 무역협상에서는 더욱 민감한 이슈들이 남아 있어 험로가 예상된다.
1단계 합의문에 지식재산권 침해, 기술 강제 이전 등 일부 쟁점에 거론됐지만 2차 협상에서 구체적인 추가 논의가 필요하고 중국이 가장 꺼려하는 국영기업 보조금 등 구조개혁 문제는 제대로 테이블에 올려놓지도 못했다.
중국은 미국의 핵심 요구사항인 국영기업 보조금 지급 중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있다. 또 미국이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 제재를 둘러싼 문제도 2단계에서 다뤄야할 뜨거운 감자다.
미국은 무역협상과 별개로 중국의 굴기(堀起)를 견제하기 위한 기술전쟁은 계속 이어갈 태세여서 미·중 협상 과정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서명식에서 “중국과 2단계 협상을 곧 시작할 것”이라면서도 “2단계 무역협상이 마무리되면 그동안 무역전쟁 과정에서 부과한 대중 관세를 제거하겠다”고 밝혔다. 난제가 산적한 2단계 협상이 끝날 때까지 관세를 협상 카드로 갖고 있겠다는 의미다. 따라서 현재의 대중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가 결정되는 오는 11월 이후까지 유지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