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핵합의 탈퇴 내비친 영·프·독, 배후에 미국 협박 있었다

입력 2020-01-16 14:25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유럽 서명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이 이란 측에 합의사항 위반을 공개 경고하기 일주일 전 미국이 이들 3개국에 대(對)이란 압박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관세 보복 카드를 꺼내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5일(현지시간) JCPOA에 정통한 유럽측 당국자들을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관료들은 영·프·독이 핵합의 이행 문제에 대해 이란에 책임을 물으며 분쟁조정절차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유럽산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영·프·독 외무장관들은 전날 이란의 핵합의 미준수를 비판하며 분쟁조정절차를 시작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에 미 행정부의 입김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던 유럽 3개국마저 JCPOA 탈퇴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경고 메시지는 각국의 미국 주재 대사관이 아니라 JCPOA 실무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에게 직접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 차원의 은밀한 협박은 해당 국가의 관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영·프·독 관료들은 애초 분쟁조정절차를 개시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트럼프 측에서 위협이 들어오자 계획 철회를 고심했다고 한다. 미국이 3개국에 보낸 협박 메시지가 밖으로 새어나갈 경우 유럽측이 미국의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WP에 “우리는 약하게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미국 측 협박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2018년 5월 JCPOA를 ‘역사상 최악의 합의’라고 맹비난하며 일방적으로 합의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성과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란은 이에 대한 반발로 지난해 5월부터 두 달 간격으로 핵합의에 따른 이행 범위를 단계적으로 축소해왔다. 유럽 서명국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도 JCPOA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양측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배후에서 지속적으로 JCPOA를 흔드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력으로 합의가 붕괴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서명국들 사이에서 JCPOA에 대한 기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의 우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전날 기존 JCPOA를 트럼프식 새 협약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프랑스도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내놨다. 새 핵협상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이날 의회에서 “미국과 이란이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이란이 미국과의 광범위한 대화를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