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 변호사)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검찰 공소장이 유죄 예단을 갖게 했다” “별건 자료 제출은 법관의 사법적 통제를 무시하는 행위”라는 등의 표현을 판결문에 적시해 검찰 수사방식을 정면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8부(부장판사 박남천)는 13일 직권남용·공무상비밀누설 등 혐의로 기소된 유 전 연구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가 혐의를 입증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 측이 검찰 수사 과정의 위법성에 대해 문제제기한 내용을 대부분 기각했지만, ‘공소장 일본주의’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 등 일부 쟁점에선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재판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도 맡고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유 전 연구관(2015년 2월~2017년 2월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 재임)은 2016년 2~3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공모해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인 성형외과 김영재씨와 부인 박채윤씨의 특허소송 정보를 청와대에 넘겨준 혐의(공무상비밀누설)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휘하 재판연구관에게 소송 심리계획 등이 담긴 ‘사안요약’ 문건을 작성하게 한 혐의(직권남용) 등도 있다.
유 전 연구관은 이에 대해 “재판장에게 착각·예단을 불러일으켜 피고인에게 유죄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공소를 제기할 때 판사의 유죄 심증을 형성할 수 있는 자료 없이 공소장 하나만을 제출해야 한다는 ‘공소장 일본주의’ 원칙에 위배됐다는 것이다.
검찰은 재판 도중 공소장변경허가 신청을 하면서 유 전 연구관과 임 전 차장에게서 재판 정보가 담긴 문건을 받은 대상을 박 전 대통령 등에서 ‘사법부 외부의 성명불상자’로 고쳤다. 임 전 차장이 양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원하는 사항에 대해 청와대 협조를 받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도 삭제됐다.
재판부는 “(검찰이 처음 기재한 대목은) 공소사실 특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며 “이런 식의 공소장변경은 엄격한 증거 조사 전 법원에 예단을 발생하게 해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위험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유 전 연구관이 재판연구관 시절 검토했던 사건을 퇴임 후 수임한 것으로 보고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공소장에 적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 역시 “‘전관예우’와 결부시켜 강한 유죄의 심증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다만 “기소한 입장에선 어느 정도 주변사실을 적시할 필요는 있는데, 범죄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정도라고 단정하긴 어렵다”며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배했다는 유 전 연구관 측 주장을 기각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를 제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검찰은 2018년 9월 유 전 연구관의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영장에 기재된 방법 이외의 검색어를 입력해 나온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촬영한 뒤 이를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강제처분에 대한 법관의 사법적 통제를 무시하는 행위”라며 “위반행위가 중대해 적법절차의 실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경우”라고 성토했다. 이때 제출된 증거는 결국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1심의 사실오인 및 법리 오해에 대해 항소해 바로잡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