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호주… “영화 ‘매드 맥스’ 같아”

입력 2020-01-13 15:42

호주 산불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호주 국민들의 건강에도 비상이 걸렸다. 산불로 발생한 매캐한 연기가 호주 전역을 뒤덮으면서 화재의 직접 피해 범위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도 호흡기와 피부 질환을 호소하는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자욱한 연기가 햇빛을 차단하면서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이 인류 문명 붕괴 이후를 소재로 삼은 호주 영화 ‘매드 맥스’에 비견할 만하는 얘기도 나온다.

12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캔버라 시민인 제니 에드워즈는 최근 가족과 함께 12일 동안 휴가를 다녀왔다. 산불로 인한 매캐한 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당초 일정을 일주일로 잡았다가 산불 진화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5일 더 연장했다.

휴가 일정이 모두 끝난 뒤에도 산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거대한 산불은 캔버라에서 약 100㎞ 떨어진 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짙은 매연은 어느 정도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적갈색 연무에 뒤덮여 있었다. 에드워즈는 캔버라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따갑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두통도 찾아왔다. 잔기침이 연신 이어졌지만 목의 따끔따끔한 이물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호주 전역에서는 응급 신고와 앰뷸런스 호출, 응급실 방문 횟수가 급증하는 추세다. 산불로 인한 대기오염 때문에 직접적으로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의 거주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 7뉴스 시드니는 시드니 동부 지역 기준 대기오염 상태가 하루에 담배 19개비를 피운 것과 같다고 보도했다. 호주 연방정부 일부 부서는 관공서 문을 닫고 비필수 인력에게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연기는 호주 국민들의 일상생활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캔버라의 병원 응급실 의사인 데이비드 칼디콧은 연기가 병실과 복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병원 출입문을 항상 닫아놓는다고 전했다. 정밀 장비인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장치는 연기 때문에 먹통이 된 상황이다. 칼디콧은 집안에 설치된 화재경보기가 새벽에 산불 연기를 감지하고 울려대는 바람에 경보 센서를 수건으로 덮어둬야 했다. 그는 “영화 매드 맥스 같은 상황을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산불 사태가 장기적으로는 호주 국민들의 정신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2009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한 달여 동안 진행돼 사망자 173명을 낸 ‘검은 토요일’ 화재의 경우 소방관과 지역 주민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PTS)를 겪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번 화재는 인명피해는 11년 전보다 적지만 호주 전 국토에서 4개월 넘게 이어지는 등 규모 측면에서 훨씬 크다. 미렐라 디베네데토 로열멜버른공대 교수는 “수개월 뒤 국민들의 정신과 육체 건강에 큰 충격이 찾아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산불 사태 와중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부적절한 처신으로 구설에 올랐던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정부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모리슨 총리는 호주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산불 초기 단계에서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훨씬 더 나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자국 석탄 산업 보호를 위해 산불과 기후변화의 연관성을 부인해오던 모리슨 총리는 “우리는 점점 더 길어지고, 더 더워지며, 더 건조해지는 여름 속에 살고 있다”며 “이는 분명히 조금 더 광범위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시인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