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 선거에서 독립 성향의 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재선에 성공하자 중국과의 갈등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차이 총통이 당선 소감으로 “(중국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중국은 “대만 독립이나 분열 시도를 결연히 반대한다”고 경고했다. 중국 언론들도 차이 총통에게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차이 총통의 집권 2기에도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등을 둘러싸고 대만과 중국의 벼랑 끝 대치가 이어질지 주목된다.
8일 중화권 매체에 따르면 차이 총통은 당선이 확정된 전날 오후 9시(현지시간)쯤 민진당 선거운동 본부 앞 무대에 올라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대만인들은 더욱 크게 우리의 의지를 외칠 것”이라며 “국민이 선택한 정부는 절대로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차이 총통은 다만 “중국이 대만의 민의를 존중하고, 중화민국 대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언제든 양안 간 대화와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지를 열어뒀다. 양안 관계 키포인트로는 평화와 평등, 민주, 대화 등 4단어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 마샤오광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대변인은 “우리는 평화통일과 일국양제의 기본방침과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다”며 “중국은 국가 주권과 영토 보존을 결연히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어떠한 형식의 대만 독립과 분열 시도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관영 환구시보와 글로벌타임스는 공동 사설에서 “대만 민진당은 선거 때마다 중국 대륙에 대한 민중의 두려움을 조장했다”며 “홍콩에 대한 중국의 간여가 대만에도 발생할 것처럼 오해를 부추겼고, 대만의 여론의 오보도 정점에 달했다”고 선거 결과를 깎아내렸다. 사설은 “차이 총통이 대만을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인 차이 총통은 817만231표(57.13%)를 득표해 552만2119표(38.61%)를 얻은 국민당 후보 한궈위 가오슝 시장을 264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15대 대만 총통에 당선됐다. 차이 총통은 이번 선거에서 1996년 대만 총통 직선제 시행 후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유권자 1931만 명 가운데 1446만 명이 투표해 74.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2016년 대선 때의 66.27%보다 높은 수준이다.
여당인 민진당은 같은 날 치러진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113개 의석 중 과반인 61석을 차지했다. 국민당은 38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번 선거에서는 홍콩 시위 사태가 영향을 끼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귀향 전세 버스를 마련하는 등 청년층의 투표 열기가 뜨거웠다. 중국의 압박이 높아지면서 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망국 위기감’(亡國感)과 함께 반중 정서가 확산된 탓으로 풀이된다.
선거 전날 타이베이 버스 터미널과 기차역 등에서는 주요 지역 교통편이 속속 매진됐다. SNS에는 투표를 위해 귀국했다며 여권 사진을 올리는 ‘인증샷’ 바람도 불었다. 대만에서는 부재자 투표 제도가 없어 주소에서 투표해야 한다.
차이 총통은 ‘집으로 가 투표하자’는 슬로건으로 젊은 층의 귀향 투표를 독려했다. 올해 처음 투표하는 118만 명 가운데는 만 20세의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도 포함되면서 ‘쯔위 세대’로 불리기도 했다.
중국은 이번 총통 선거에서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펴다 거센 역풍을 맞고 ‘반중파’ 차이잉원 총통 재선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향후 유화책을 내놓을지도 주목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내세우며 홍콩, 마카오를 포함해 대만까지 통일하는 큰 그림을 강조하고 있으나 근간인 일국양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 웨스턴켄터키대학의 티모시 리치 교수는 “중국이 15개국뿐인 대만 수교국에 ‘단교’ 압박해 대만을 고립시킬 수 있다”며 “중국 당국자들은 이런 압박이 오히려 민진당의 지지율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린잉위 대만 중정대학 교수는 “중국이 과거처럼 군용기를 대만 주변에 띄우는 등 군사적 위협을 계속할 가능성이 있다”며 “하지만 대만 내 높아지는 반중국 정서를 감안하면 기존 대만 정책 수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