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협력, 북·미 대화 촉진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구상에 대해 북한이 노골적인 ‘통미봉남’식 답변을 내놨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 생일 축하 인사를 문 대통령이 대신 전달해 달라고 했다”고 하자,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은 “남조선 당국이 설레발을 치고 있다”며 대놓고 면박을 준 것이다. ‘북·미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북한의 입장이 명확해지면서 한국 정부가 비핵화 협상 중재자 역할이 아닌 남북 협력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평가다.
김 고문은 11일 담화를 통해 “새해 벽두부터 남조선이 우리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미국 대통령의 생일축하 인사를 대긴급 전달한다면서 설레발을 쳤다”며 “남조선이 대긴급통지문으로 그 소식을 알려왔는데 아마도 남조선은 조·미 수뇌들 사이에 특별한 연락통로가 따로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다”고 맹비난했다.
미국을 방문했던 정 실장은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을) 마침 만난 날이 1월 8일, 김 위원장 생일이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걸 기억하고 문 대통령께 김 위원장 생일에 대한 덕담을 하면서 그 메시지를 김 위원장께 꼭 좀 전달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고 말한 바 있다. 정 실장의 발언은 미국이 여전히 문 대통령을 북·미 간 중재자로 생각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 하루도 안 돼 북한이 낯 뜨거울 정도의 비난을 쏟아낸 것이다.
김 고문은 특히 “남조선이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 관계에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면서 중재자 역할에 특히 거부감을 나타냈다.
청와대는 12일 김 고문의 비난에 대해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물밑에서는 북한이 북·미 대화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고, 문 대통령의 남북 협력 구상을 직접 비방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북한이 중재자에 대해선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체육 교류, 도로·철도 연결 등의 남북 협력 제안을 공식 반박하거나 문 대통령을 겨냥해 험담을 쏟아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북·미 간에 직접 생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미국으로부터 공유받지 못하고 불쑥 중재자 역할을 부각하려다 북한을 자극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