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재선은 1년 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시나리오였다.
2018년 1월 24일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참패하면서 차이 총통도 위기에 몰렸다.
그가 2016년 집권한 뒤 탈원전, 연금개혁, 동성결혼 합법화 등 뜨거운 정책을 추진하고 ‘탈중국화’로 본토와 자꾸 부딪히자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차이 총통은 곧바로 낙제점을 받은 책임을 지고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하면서, 2020년 재선도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최악의 레임덕이 예상됐다.
하지만 중국이 반중국 독립 성향의 차이 총통을 수렁에서 건져줬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난해 1월 ‘대만 무력 통일’을 거론하고, 대만 해협에서 잇따라 중국군의 무력시위가 이어지자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차이 총통은 “국토와 주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며 강한 이미지 구축에 발 빠르게 나섰다. 이어 중국이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가속화하고 본토 주민의 자유여행 금지 등 경제적 보복 조치까지 동원하자 반중 정서가 더욱 확산됐다.
지난해 6월부터 본격화한 홍콩 시위와 경찰의 강경 진압은 대만의 반중 정서에 불을 질렀다. 대만인들은 “우리도 홍콩처럼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결국, 대만도 홍콩처럼 중국의 일부가 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현지인들 사이에서 퍼졌다. 홍콩 시위가 확산되면서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 총통의 당선은 일찌감치 굳어졌다. 사지에 몰린 차이 총통을 그와 ‘앙숙’인 중국이 구해준 셈이다.
차이 총통은 대만 토박이를 말하는 ‘본성인’(本省人)으로, 이번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이자 ‘외성인’(外省人)의 아들인 한궈위 가오슝 시장과의 ‘출신’ 대결로도 관심을 끌었다.
외성인은 국공내전에서 패해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본토인들을 뜻한다. 지역감정이나 정치적 성향에서 외성인과 내성인의 갈등은 뿌리 깊다.
차이 총통의 조부는 광둥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객가족이고, 조모는 대만의 원주민 출신이다. 부친 차이제성은 자동차 수리업으로 시작해 부동산 투자로 영역을 넓혀 큰돈을 벌었다.
1956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차이 총통은 국립 대만대학 법대를 나와 미국 코넬대와 런던정경대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후 국립정치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90년대 국민당 소속인 리덩후이 총통 시절에 각종 정부 자문역할을 했다. 차이 총통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대만의 관세·무역 협정(GATT),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 과정에서 수석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만 독립 추구 진영의 핵심 이론가 역할을 하며 정계에 발을 담갔다.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된 뒤 차이잉원은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에 발탁되면서 양안 관계 전면에 나섰다.
천수이볜의 부패 스캔들 여파로 2008년 대선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의 마잉주에 패해 휘청이자 차이잉원이 당 주석을 맡아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2012년 대만의 첫 여성 총통 후보로 나섰다가 실패하고 2016년 총통에 재도전해 정권을 탈환했다.
차이 총통은 학자 출신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보다는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