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득점을 책임지는 공격수들에게 주로 쏟아진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의 그늘엔 점프하고 받아주고 넘어지는, 팀 승리의 윤활유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도 있다. 리베로는 그 대표 격이다. 상대팀의 강한 공격을 후방에서 묵묵히 받아낸다.
10일 중국 장먼의 완다 렐름 호텔에서 만난 남자배구 대표팀의 리베로 정민수(KB손해보험)는 자신의 역할을 ‘희생’으로 정의 내렸다. 그는 “저는 돋보이고 싶지 않다. 궂은일을 더 하고 싶은 사람”이라며 “희생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팀원들에게 파이팅을 불어넣어주고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더 뛰는 게 바로 희생”이라고 말했다.
정민수의 팔뚝은 나무껍질처럼 두껍고 거칠었다. 링거를 꽂을 때 ‘탁’ 소리가 날 정도라고 한다. 178㎝로 단신인 그는 그런 두 팔로 B조 조별리그 내내 2m가 넘는 거한들의 공격을 연거푸 받아냈다.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에 참가한 전체 선수 중 리시브 3위(효율 50.94%), 디그 5위(세트당 평균 2개)의 기록은 희생의 부산물이다.
정민수는 “대회엔 모두 국가대표만 있다. V-리그에서 만나는 선수들과는 체격조건과 볼의 강도가 다르다”며 “이기려면 한 발짝 더 뛰고 더 넘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민수에게도 9일 카타르전은 시험대였다. 안심한 나머지 3, 4세트를 내리 내줬다. 카타르의 기세에 정민수도 주눅 들어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 그는 “공이 무서울 정도로 서브가 강하게 날라왔다.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다”고 상기했다.
운명의 5세트. 정민수를 다잡은 건 팀원들이었다. 정민수는 “(리시브) 받는 입장인 (전)광인이, (정)지석이와 함께 ‘후회 없이 하자. 우리가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받자’며 서로 독려했다”며 “형들도 뒤에서 리드하는 입장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소리를 더 질러주라고 조언했다. 그게 5세트를 버티는 힘이었다”고 밝혔다.
한국은 이제 아시아 최강 이란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있다. 이란의 전력이 낫다는 평가가 많지만 정민수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란이 A조 1위를 확정지었을 땐 마음속으로 ‘아싸 됐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는 “(박)철우 형이 미팅 후 ‘전혀 꿇릴 게 없다. 지금 당장 경기장에 가고 싶을 정도로 자신 있다’고 했다고 해 모두가 동의했다”며 “이란은 잔기술이 좋지만 높이나 조직력은 약하다. 충분히 이긴다”고 강조했다.
선수들의 간절함은 이란을 이길 무기다. 20년 동안 올림픽에 가지 못했다. 선수들은 한국 남자배구의 미래까지 고민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올림픽 진출권을 꼭 따내 남자배구를 이슈화시키고 제반 환경을 개선하자고 뜻을 모았다.
정민수는 “요새 (전)광인이, (정)지석이와 ‘케미’가 잘 맞는다. 받는 사람이 잘 받아야 반타작은 한다는 (전)광인이 말처럼 공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어떻게든 살려서 세터에게 넘기겠다”며 “한국인만의 투지와 끈끈함으로 이란에 맞서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발언을 남겼다.
“우리가 이기면 사람들은 ‘예상 밖의 승리’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승리를 예상하고 있어요.”
장먼=글·사진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