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역사 안 바뀌었지만, 정의의 씨 뿌리겠다”

입력 2020-01-10 15:51
서지현 검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지현(47·사법연수원 33기) 검사가 안태근(54·20기)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 사건 파기환송과 관련, “여성을 혐오하고 학대한 길고 긴 잔인한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면서도 “진실의 씨를, 정의의 씨를 포기하지 않고 뿌리리라 마음먹겠다”고 적었다.

서 검사는 10일 페이스북에 올린 ‘쉘위쏘우’라는 글에서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다. 그는 “까마득한 날에 JTBC 처음 열리고 어디 피해자들 통곡 소리 들렸으랴. 모든 언론이 클릭을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검찰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음해와 부지런한 거짓말들이 피어선 지고 큰 법원이 ‘인사보복이 재량’이란다. 지금 눈 내리고 촛불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진실의 씨를 뿌려라”며 “다시 조금만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우리 아이들이 있어 이 광야에서 춤추고 노래하게 하리라”고 했다.

서지현 검사가 1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 페이스북 캡쳐


서 검사는 재해석한 시와 함께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그는 “인사제도에 반한 유례없는 발령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사보복’이 ‘재량’ 범위 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을 받아들고, 10년 만에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또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며 “한 번 싸움을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거라는 경험담을 듣고 염치없는 자들의 보복을 염려했다”고 적었다.

서 검사는 파기환송 결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그는 “권력과 재량의 미명 하에 약자들을 함부로 취급하고 여성을 혐오하고 학대하고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길고 긴 잔인한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그 열매를 거두어 달라진 세상 속에서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각자 생긴 대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허리가 휘고, 손마디가 닳을지언정 진실의 씨를, 정의의 씨를 포기하지 않고 뿌리리라 마음먹어 본다”라고 적었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태근 전 검사장이 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석방돼 나오고 있다. 이날 대법원 2부는 안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뉴시스

서 검사는 마지막으로 지지자들의 응원과 참여를 당부했다. 그는 “단지 그때가 ‘천고’의 뒤가 아니라 ‘조금만’ 뒤가 될 수 있도록 손 붙잡고 함께 씨 뿌려보자. 함께 손 붙잡고 씨 뿌려주시는 한 저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겠다. 진실의 힘을, 정의의 힘을 다시 믿어본다”며 글을 맺었다.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지난 9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안 전 검사장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안 전 검사장이 서 검사를 성추행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인사 보복을 했다는 1심과 2심의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박준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