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놀이터, 도시 재생의 핵심”

입력 2020-01-09 18:30 수정 2020-01-22 14:42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의 위치도. 빨간 원 표시가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가 자리한 곳이다. 공원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놀이 정책의 선진국, 영국의 놀이 공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해 11월 런던을 찾았다. 영국은 2008년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한 후 아이들에게 평등한 놀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본 지는 ‘애비 오차드 커뮤니티 가든’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 ‘킬번 모험놀이터’ ‘홀랜드파크 모험놀이터’ ‘바너드 모험놀이터’ ‘바터시 놀이터’ 등 10여 곳을 방문했다.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개성이 강한 3곳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기사를 읽는 내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과 13년 전만 해도 영국은 세계 선진국 중 아동복지 분야 점수가 최하위로 낙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만큼이나 덜 걷고 실외놀이를 할 기회가 적었으며 어른들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고 있었다.

‘빈민가’ 동부

“사무실이 동쪽에 있네요?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무래도 자주 오게 되는 곳은 아니에요. 이것 봐요. 동네가 덜 깨끗하고, 주변이 좀 그렇죠?”

가이드는 이날 만나기로 한 건축사 사무실을 찾느라 연신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런던 동부 일대가 다른 지역과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말을 듣고 창문 밖을 유심히 보니, 어제까지 봐 온 런던 중심가와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낡은 집들이 관리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런던은 동쪽과 서쪽 간에 지리적 양극화가 비교적 또렷한 편이다. 런던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첼시, 켄싱턴 등 집값이 비싼 부촌이 위치한다. 반면 동쪽은 오래전부터 해외 이민자나 런던 항의 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다수 거주하면서 자연스레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를 형성해왔다.

지난해 11월 영국 런던 동부 앤드류 거리에 있는 에렉 건축사 사무실을 찾았다. 문정임 기자

올림픽이 끝난 후

2012년 런던올림픽이 끝난 후, 영국은 경기가 치러진 올림픽 공원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신·증설한 시설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낡고 낙후한 런던 동부를 생기있고 살기좋은 지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도에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 하던 동부 스트랫포드 일대의 도시재생 사업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이 무렵이다. 사실 영국 정부와 런던시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런던 동부 6개 자치구를 올림픽 개최 장소로 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공원이 있는 런던 동부 스트랫퍼드 일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름하여 프로젝트 ‘올림피코폴리스’. 새로운 도시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프로젝트명처럼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런던유산개발회사(London Legacy Development Corporation)를 설립하고, 2030년 완성을 목표로 20개의 마스터 플랜을 수립한다.

이 중 하나가 바로 ‘놀이공간’이다. 레거시개발공사는 올림픽 공원 북쪽에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간을 배치해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을 유인하는 방식으로 동부지역의 도심재생을 이끌어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런던 동부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 안에 조성된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의 모습. 나무를 주 재료로 나무집과 흔들리는 다리, 그물망 등이 설치돼 있다. 바닥은 인공 고무매트가 아닌 나무조각과 낙엽으로 채워져 있다. 문정임 기자

자연과 모험이 있는 도심 놀이터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공원의 북쪽, 팀버로지 커뮤니티센터와 카페 옆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에 있지만 다양한 자연물을 활용해 갖가지 놀이가 가능하도록 조성했다.

놀이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높은 나무집이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성냥불 형태로 나무들을 엮었다. 높은 곳에 오르고 싶고, 작은 아지트를 갖고 싶은 아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무집으로 가는 길은 흔들리는 다리와 그물망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나무판과 야자수를 이용한 굵은 줄로 만들어졌다. 다리는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연결돼 있다. 아이들은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아찔함을 맛 본다.

높은 나무집과 흔들리는 다리의 밑은 나무 조각과 낙엽이 메우고 있다. 고무매트보다 더 푹신푹신하다. 추락 시 아이들을 보호해줄 재료가 고무매트만은 아님을 알려준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의 한 부분인 계곡 놀이터. 수동 우물펌프에서 나오는 물이 울퉁불퉁한 지형을 따라 흐르도록 설계했다. 봄~가을이면 이곳에는 아이들로 가득찬다. 문정임 기자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긴 지형을 따라 들어섰다. 마치 그 옆을 흐르는 하천의 모양을 닮았다. 팀버로지 커피숍이 있는 아래로 내려가면 계곡을 연상케 하는 물 놀이터가 있다. 실제 계곡이 그렇듯, 여러 개의 수동펌프에서 물이 나오고, 물은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흐른다. 땅은 하천의 바닥처럼 울퉁불퉁하다. 운동화를 신고도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겨울 비날씨로 물 흐름이 중단돼 있었지만 “평소에는 수많은 아이들로 북적인다”고 피터 튜더(Peter Tudor) 런던유산개발회사 관계자는 말했다.

계곡 놀이터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아주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모래와, 나무로 만들어진 단순한 기구들이 있어 이곳 또한 아이들이 놀기에 좋다. 모래는 형태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마음대로 자기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좋은 놀잇감 중 하나다.

놀이터 주변으로 111에이커(44만9201㎡)에 달하는 올림픽 공원 공터에는 갖가지 꽃과 식물, 넓은 초원, 복잡한 습지가 어우러져 있다. 그 속에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들어선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그 자체의 특성과 주변 배경으로 인해 도시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자연적인 환경에서 놀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에렉 건축사 사무소의 수잔 투치 공동대표가 자신이 설계한 놀이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정임 기자
어른들이 ‘놀이공간’에 담고 싶었던 것은

이 곳을 설계한 ‘영국의 어른들’은 놀이터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지난해 11월 런던 동부 앤드류 거리에 있는 에렉 건축사 사무소를 찾아 수잔 투치(sujanne tutsch) 공동대표를 만났다.

독일 남부지방에서 자란 그는 영국으로 건너왔을 때 아이들을 보며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그는 놀이터에서 놀지 않았다. 부모님과 산책하고 농장에서 뛰어 놀며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영국의 아이들은 나무는 알지만, 나무의 느낌은 모른다. 아이들이 나무를 만지며 자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아이들은 직접 버스라도 타고 학교를 가지만, 영국에선 아직도 부모가 직접 학교에 데려오고 데려가야 하기 때문에 주로 차량을 이용한다”며 “이전 세대에 비해 아이들의 움직임은 매우 적어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영국이 본격적으로 아이들의 놀이문제에 관심을 가진 2000년대부터 플레이 잉글랜드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놀이터를 디자인했다.

놀이터를 설계하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탐험’ 요소를 어떻게 심어놓는 가이다. 그는 “영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는 놀이시설이라도 전체적인 철학이 유익하다고 판단하면 시설 사용을 허가한다”고 말했다. 이는 “위험요소를 전혀 접하지 않은 경우보다, 겪어보는 것이 차후 더 큰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놀이터를 디자인해왔지만 그녀의 고민은 계속된다. 에렉 건축사무소에서는 주로 목재를 사용하는데, 목재를 활용한 놀이 재료들이 쇠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비해 관리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모험과 안전의 오묘한 경계선을 어디서 그어야 할까 모호한 지점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완성품보다 놀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 자체의 의미가 크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는 “놀이터가 위치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그 주변에서 나오는 재질을 사용하거나, 놀이터를 설계할 때 아이들을 디자인에 참여시키는 일, 주변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조언했다.

피터 튜더(Peter Tudor) 런던유산개발회사 관계자가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 프로젝트에서 텀블링베이 놀이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정임 기자
놀이터는 주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핵심 요소

놀이공간을 획기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은 에렉 건축사 사무소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의 재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런던유산개발공사 역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새로운 놀이터를 욕심냈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가 들어선 이 곳은 15년전만해도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올 이유가 없던 곳. 하지만 2012년 영국 정부와 런던시가 동부 지역의 대대적인 변신을 시작했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 중 하나로 ‘놀이공간’을 겨냥하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다.

놀이터에서 만난 피터 튜더(Peter Tudor) 런던유산개발회사 관계자는 “북쪽 공원의 놀이공간은 주변의 자연물과 어울리면서 아이들에게 도전과 모험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방향을 잡았다. 2012년 올림픽에 앞서 2011년 말 이미 놀이터 설계 공모를 진행했는데, 최종 낙점을 받은 곳이 런던에 본사를 둔 ‘에렉건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에렉건축이 제시한 계획서엔 자연에서 나무를 타고, 일상적인 모험을 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며 “이렇게 탄생한 텀블링베이 놀이터는 사람들이 올림픽 공원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전환점이 됐다”고 부연했다.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경계선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주택가와 마주한다. 내 아이가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멋진 공간이 집 가까이 있다면, 어느 부모가 그 마을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을까. 젊은 가족을 마을로 유인하는 것은 지역으로서도 욕심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는 대규모 복합단지와 공원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와 아이들이 집에서 만든 다양한 음식과 음료를 들고 가족 단위의 휴식을 취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장소라는 이점을 갖고 있다.

※ 이 기사는 제주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습니다.

런던(영국)=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