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목을 치라”더니… 전쟁 위기서 꼬리내린 중동 親美국가

입력 2020-01-09 13:03

대(對)이란 초강경 정책을 주문해온 중동 지역 친미 국가들이 미국과 이란이 극한 대립을 벌이는 와중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노출해 빈축을 사고 있다. 과거 이란 정권을 겨냥해 “뱀의 머리를 자르라”고 부르짖던 이들이 막상 전면전 위기가 불거지자 미국과 이란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강성 매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마저 사석에서 이번 사안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8일(현지시간) “지난 수년 동안 중동 국가들은 이란 핵합의 체결을 비난하며 미국이 이란에 강경한 정책을 취하라고 촉구해왔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강경 발언을 쏟아내자 이를 칭송했다”면서 “이제 미국의 중동 지역 핵심 동맹국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 피살 이후 미·이란 간 긴장이 고조되자 중동 국가들이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니파 맹주로서 시아파 이란을 ‘숙적’으로 간주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솔레이마니 사령관 사망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감당 못할 결과를 불러올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제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아랍에미리트(UAE) 역시 “현재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화와 정치적 해결이 중요함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이란에 매우 적대적인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개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의 솔레이마니 사령관 살해를 칭송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사석에서 “이번 일은 미국의 사안이지 이스라엘의 사안이 아니다”며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그쪽으로 끌려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동 지역 친미 국가들이 최근 보였던 태도는 과거 이들이 취해왔던 입장과는 결이 다르다. 이들은 이란 핵시설 폭격을 포함한 초강경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전 사우디 국왕이 2008년 4월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당시 미 중부군사령관과 만난 자리에서 이란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뱀의 머리를 잘라 달라”고 언급했던 일화가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폴리티코는 중동 지역 친미 국가들이 전쟁 발발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정권의 기반이 취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란은 미국이 자국에 보복을 가하면 이스라엘과 UAE를 공격해 전쟁을 확전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성격상 전쟁 파트너로서 트럼프 행정부를 장기간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틴 디완 워싱턴 아랍걸프국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현실을 직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랍 국가의 한 관리는 사우디 등 친미 국가들이 강경 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밀어붙일 의도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 관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위를 고려한다”며 “이란은 중동 지역 안정을 해치는 세력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 국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긴장 완화로 돌아선 배경에는 중동 내 친미 국가들의 물밑 설득 작업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