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주권 찾은 판결”… 무용계, ‘위계 성폭력’ 유죄 연대 물결

입력 2020-01-09 07:33 수정 2020-01-09 07:35
게티이미지뱅크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유명 무용가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국 무용 역사상 최초의 반(反) 성폭력 연대 ‘무용인 희망연대 오롯위드유’는 “무용수들은 이번 판결을 근거로 무용 작업 중 자신의 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환영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연학)은 8일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업무상위력등에의한추행) 혐의로 기소된 류모(49)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 취업 제한 3년도 함께 명했다. 검찰의 보호관찰 명령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이 보호 감독하는 지위에 있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위력으로 성추행한 것이 모두 인정된다”며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으로 무용 활동에 관한 꿈을 상당 부분 접었고, 피고인에 대해 엄한 처벌을 탄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사건을 애정 문제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피해자로부터 용서받거나 피해 회복을 위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는 ‘피고인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당황하고 몸이 얼어버렸다’고 진술했다”며 “피고인과 피해자의 지위, 피고인의 위력 행사, 피해자의 피해 감정 등을 종합하는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류씨는 2015년 4~5월 자신의 개인연습실에서 제자인 피해자를 안고 입과 목에 키스하는 등 4차례 걸쳐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업무고용인 관계를 이용해 위력으로 성추행했다며 그를 기소했다. 류씨는 동의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위드유는 판결 직후 성명문을 내고 “재판부가 엄정하게 판단하여 내린 유죄 결정에 오롯_#위드유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들은 류씨의 성폭력 사건 이후 실명을 내 걸고 연대했다. 공판에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방청단을 모집해 방청연대를 진행했다. 1000명에 가까운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탄원서로 연대의 뜻을 밝혔다.

위드유는 “스승과 제자, 안무가와 무용수라는 관계에서 발생한 위계에 따른 성폭력 사건”이라며 “이번 유죄 판결은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권위주의와 비민주적 현장에 균열을 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되리라 여긴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무용계의 침묵을 뚫고 여러 번의 연대 서명과 탄원을 할 수 있었던 힘은 피해자 학생의 맞서 행동하는 용기에서 시작됐다. 류씨 사건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게 될 가능성이 높은 현 상황에서 피해자는 끝까지 싸워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있다”며 “위드유 역시 흔들리지 않고 피해자 곁에 서서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2차 가해에 대응하고 가해자가 정당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각계 활동가들도 입장을 내고 재판부의 판단을 환영했다. 윤단우 무용평론가는 “이제 사법부의 책임이 예술계로 넘어왔다. 20년전, 무용계는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의 손을 잡고 피해자를 내몰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며 “다시 20년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산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우리 사회는 이제 스승이나 제작자, 단체 대표의 성적 폭력을 낭만적 이성애 각본으로, 여성의 성을 지위, 활동 기회와 교환하려한다는 거래의 각본으로 왜곡해 해석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며 “이번 판결이 앞으로 신체의 자유와 성적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여성예술인들에게 뒷받침이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