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형사 재판을 앞두고 영화 같은 탈출극을 벌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카를로스 곤 전 닛산(日産)자동차 회장이 일본 탈출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 검찰의 기소는 근거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곤 전 회장은 8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며 “일본 검찰에 의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잔인하게 떨어져 있어야 했다”고 일본 검찰을 비판했다.
이어 “금전 비리로 나를 기소한 것은 근거가 없다”며 “왜 그들(검찰)은 조사기간을 연장하고 나를 다시 체포했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14개월 동안 내 영혼을 파괴하려고 시도하고, 내가 아내와 연락하는 것을 막았다”고 지적했다.
곤 전 회장은 또 일본 검찰이 자신을 조사하면서 변호사 입회를 허용하지 않고 자백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자신이 일본에서 재판을 받으면 유죄를 받을 확률이 99.4%나 된다며 외국인에 대한 일본 법정의 유죄 판결 비율이 훨씬 높다고도 강조했다.
곤 전 회장은 닛산과 르노의 싸움 과정에서 닛산과 일본 정부의 공모로 자신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친구들 중 일부는 닛산에 대한 르노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 나를 제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일본 당국이 개입돼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와 관련된 일본 공무원들의 실명은 밝히지 않겠다고 전했다.
그는 그동안 르노와 닛산, 미쓰비시의 3사 얼라이언스가 경영통합과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부세력의 모략에 당했다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전면 부인해 왔다.
그는 “절망감이 크다”고 심경을 토로하면서도 “내가 레바논인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레바논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지지해줬기 때문”이라고 레바논 정부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하고 기자회견장에 나온 곤 전 회장은 차분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고, 기자회견장에서는 중간중간 박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곤 전 회장은 지난달 30일 레바논에 비밀리에 입국한 뒤 9일만에 등장했다. 그는 2018년 11월 유가증권보고서 허위기재와 특별배임 등 혐의로 일본 사법당국에 구속됐다가 10억엔의 보석금을 내고 지난해 3월 풀려났다. 이후 한달여 만에 재구속된 뒤 추가 보석 청구 끝에 5억엔의 보석금을 내고 지난해 4월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곤 전 회장은 지난달 29일 낮 도쿄 자택에서 걸어나온 뒤 그날 밤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터키 이스탄불로 도주했다. 이스탄불에서는 또 다른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레바논으로 이동했다. 일본 수사당국은 곤 전 회장이 큰 상자에 숨어 일본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은 레바논 정부에 곤 전 회장의 수배를 내리고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하지만 레바논이 그의 신병을 일본에 넘길지는 불투명하다. 레바논과 일본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