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면지 사인받아 내 돈 빼돌린 그들, 나를 딸이라 불렀다”

입력 2020-01-09 00:19 수정 2020-01-09 15:52
2018년 12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 힐튼 서울에서 열린 XIAOMI ROAD FC 051 XX에서 아톰급 챔피언 함서희와 박정은이 타이틀 매치를 하고 있다. 뉴시스 로드FC 제공

케이지 안에 선 두 선수는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어느 한쪽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거나 싸우길 포기하면 경기는 멈춘다. 피와 땀이 범벅되고 나면 ‘파이트머니’(fight money·대전료)를 받는다. 대부분의 격투기 선수들은 연봉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돈은 이들이 받는 유일한 보수다. 그야말로 ‘맞아가며 번 돈’이다.

국내 여성 종합격투기 일인자인 함서희(33·부산팀매드)는 최근 일본 에이전시 CMA 모로오카 히데카츠 회장 부부의 파이트머니 횡령 의혹을 폭로했다. 2007년 2월 일본 무대에 데뷔한 뒤 줄곧 함께해온 부모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지난 1일 SNS에 장문의 글을 올려 믿음을 배신당했다고 호소했고, 한국 소속 단체인 로드FC도 법적 절차를 공식화했다. 국민일보는 지난 6일 함서희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모로오카 스캔들’의 실체와 그의 심정을 직접 들어봤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묻는다면…

함서희가 모로오카 회장과 그의 아내인 재일교포 이윤식씨의 횡령 사실을 포착한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13년 넘게 함께 일했지만 그들의 부정행위를 안 것은 석달 남짓이다. 모로오카 회장 내외가 선수들의 파이트머니를 가로채고 있다는 말들은 암암리에 퍼져있었지만 믿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들을 ‘부모’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딸’이라 불렸기 때문에.

함서희가 데뷔할 당시 국내에는 싸울 무대가 없었고 선수들에게 일본 경기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로오카 회장 부부는 황무지에 놓였던 그를 이끌어주고 일본 활동 전반을 관리해줬던 고마운 사람들이다. 함서희는 “일본에만 매달려 시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며 “그냥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그 자체로도 고마웠던 내게는 점점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설 무대가 없던 한국 선수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을 이용한 셈이다.

너무 믿었던 탓도 있지만, 믿을 건 그들뿐이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을 따라야 했다. 여기에 회장 부부의 뻔뻔함은 그의 의심을 사전에 차단했다. 함서희는 “돈 이야기가 나오면 굉장히 예민해했다. 자신의 파이트머니를 물어보는 선수들을 시합에 쓰지 않으려고 했다”며 “내게 그런 선수들에 대한 험담까지 한 적 있다”고 털어놨다. 회장 부부는 돈 이야기를 꺼내는 선수들 뒤에서 “지금 돈이 중요하니, 본인이 잘해야지. 어디서 돈을 물어보고 있어”같은 말을 했다.

‘뭔가가 이상하다… 진짠가?’

모로오카 회장 부부는 자신들의 수고를 지나치게 강조하곤 했다. “(대회사에서는) 이것 밖에 안 주는데, 우리도 노력하고 있다” “사비 털어서 너희 써주는 거다” 등의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그 말을 신뢰해왔던 함서희는 13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계약서를 마주하고 나서야 모든 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연말 시합을 준비하면서 증거들을 보기 시작한 뒤부터는 ‘확실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하지 않은 사인이 돼 있고, 서명란에는 내 필체를 따라 한 글씨가 쓰여있었다”고 회상했다. 정확히 두 눈으로 확인한 횡령금은 3000만원 정도. 지난해 7월 치른 단 두 경기의 계약서만 확인했을 뿐이다. 함서희는 “배신감에 그저 울기만 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뉴시스 로드FC 제공

그가 전한 횡령 과정은 이렇다. 보통 대회사들은 대회가 끝난 뒤 짧게는 한달, 길게는 두달 뒤에 파이트머니를 준다. 그런데 모로오카 회장의 CMA 측은 파이트머니를 경기 당일 시합이 끝나자마자 선수에게 전달했다. 자신들의 사비로 먼저 파이트머니를 주고 두달 뒤 대회사에서 보낸 금액을 그대로 갖는 방식을 취해왔던 것이다.

함서희는 “시합이 끝날 때마다 항상 계약서가 아닌 작은 이면지 종이에 사인을 하게 했다”며 “자기네 돈을 먼저 파이트머니라는 명목으로 줘왔고 그 영수증을 끊어야 한다며 사인을 받아갔다”고 설명했다. 대회사에서 건넨 파이트머니의 총액이 얼마인지, 그중 얼마를 가로채고 얼마를 남겨 선수에게 줬는지는 그들만 안다. 늘 “그대로 전달한다” “내 돈을 덧붙여 준다”는 말과 함께 숨겨왔을 뿐이다.

격투기계 검은손… 그럼에도 나선 이유

한일 격투기 업계에서 모로오카 회장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시합에 뛰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은 뜬소문이 아니었다. 그가 일본 조직폭력단인 야쿠자 출신인 것도 이미 유명한 얘기다. CMA의 파이트머니 횡령이 의심에만 그친 것도 그의 폭력적인 권위 때문이었다. 함서희는 그런데도 사건을 공론화시키기로 했다. 지난해 12월 말 대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함서희(오른쪽)가 지난달 31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라이진 FF 20 슈퍼 아톰급 타이틀전에서 일본의 하마사키 아야카와 시합을 벌이는 모습. 연합뉴스 로드FC제공

그는 “처음에는 먼저 말씀드리고 사과를 받으려고 했다. 뺏긴 돈을 돌려받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는 확답만 받으면, 우리 쪽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며 “그런데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발뺌만 했다”고 떠올렸다. 그에 따르면 CMA 측은 관련 소송 과정을 밟는 와중에도 제물이 될 새로운 선수를 물색하고 다녔다. 함서희와 관련이 없고 로드FC에 소속되지 않은 선수들만 골라 찾았다.

함서희는 “그런 모습들을 보니 한국 선수건 일본 선수건 힘들게 번 돈을 다 뺏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나 하나로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게 할 수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거짓말, 냉담한 반응… 마주한 건 ‘적반하장’

모로오카 회장 측의 반응은 황당했다. 함서희가 이 사안으로 로드FC와 대화를 시작하자 모로오카 회장의 아내 이씨가 연락을 취해왔다. 그리고는 “나는 너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상한’ 토로를 했다. 배신자가 배신을 당한 자에게 배신을 운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씨는 “난 진심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느냐” “너에게 1원 한푼 가져간 적 없고 거짓말한 적도 없다” “내 마음이 너무 슬프다”는 말들을 쏟아냈다.

한번은 이씨가 CMA 측 통장 내역을 보내왔지만 그것조차 거짓이었다. 함서희는 “(이씨가) 두 경기의 파이트머니를 받은 내역이라고 주장했지만 한번의 경기에 해당하는 돈이더라”고 했다.

함서희가 지난 1일 SNS에 직접 쓴 폭로글.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두 건의 게시물을 올렸다. 함서희 인스타그램 캡처

그가 SNS에 폭로 글을 올린 뒤 모로오카 회장에게 받은 연락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모로오카 회장은 함서희에게 “너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너의 인스타그램을 내 손자들이 보고 있다. 내 실명을 지워주지 않겠니”라고 보냈다.

동료들에게 전해 들은 일본 현지 반응도 냉담했다. 함서희는 “모로오카 회장의 횡령 사실을 현지에서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내 폭로가 기사화되는 것을 일본 관계자들이 꺼리는 분위기라고 하더라”며 “일본에서는 기사 한줄 나가지 않았다. 내 SNS를 팬들과 관계자가 직접 보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미안하다, 고맙다, 대단하다” 쏟아진 응원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함서희는 지난달 31일 일본 라이진 여성 슈퍼 아톰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 종합격투기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 두 단체를 석권하는 기록이다.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찼지만 함서희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른 피해를 막고자 게이트를 열고 또 다른 싸움에 돌입했다.

함서희는 지난달 31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열린 라이진 FF 20 슈퍼 아톰급 타이틀전에서 일본의 하마사키 아야카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에 올랐다. 연합뉴스 로드FC 제공

그의 글로 인해 사건이 수면 위로 오르자 길고 짧은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쇄도했다. 대부분이 마음을 담은 응원이었다. 수많은 메시지 속에서 눈에 띈 건 “나도 당한 적 있다”는 동료들의 말이었다. 용기가 또 다른 용기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함서희는 “그동안 겉으로 표현하지 못해 미안하다. 고맙고 대단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또 한 일본 선수의 경우 ‘나도 비슷한 일을 당해 법적으로 처리하려다가 야쿠자 세력에 당했다’며 내 안전을 챙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팬들의 목소리도 컸다. 국내 팬들은 물론, 예민하게 반응할 거라 생각했던 일본 팬들도 박수를 보냈다. 함서희는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일본 팬들이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며 “그런데 99%가 ‘일본인으로서 너무 죄송하다’ ‘우리는 너를 응원한다’ ‘일본에 와서 계속 경기를 해달라’는 말을 하더라”고 했다.

선수들은 일본 무대를 포기할 수 없다. 격투기 불모지를 개척하기 위해 싸우고, 수차례 챔피언 벨트를 들어 올렸던 함서희이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겁이 나지만 파이터답게 싸우겠다고 했다. 인터뷰 마지막까지 동료들에게 “계약서를 체크하고 직접 사인하라”고 당부하는 모습에서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