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김기인, 한국 탑라인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입력 2020-01-07 18:41 수정 2020-01-07 18:44

기자 입장에서 ‘기인’ 김기인은 재미없는 인터뷰이다. 늘 침착하게 모범 답안만 말한다. 그런데 LoL 팬 입장에서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늘 침착하게 모범적으로 플레이한다. 탑라이너 교보재가 있다면 아프리카 프릭스 경기는 반드시 참고 영상에 들어가야 한다.

김기인에 대한 관계자 평가는 대개 비슷하다. 업계 날 것의 용어를 그대로 전달하면 ‘뭘 시켜도 잘한다’ ‘메타를 안 탄다’ ‘기복이 없다’ ‘저점이 높다’ 등이다. 비슷한 뜻을 담고 있다. 어떤 메타든, 어떤 챔피언을 시키든, 어떤 역할을 부여하든 결국엔 잘 해낸다는 것이다. 특정 과목의 전교 1등은 아니지만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맞는 학생이다.

그랬던 김기인이 ‘2019 LoL KeSPA컵’을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소환사의 협곡 전역에 영향을 끼치는 플레이에 눈을 떴다. 그간 좁은 활동 범위는 탑라이너 캐리력의 한계로 평가되곤 했다. 김기인은 과감하고 영리한 순간이동 활용으로 이 틀을 깼다.

레넥톤을 골랐던 4일 준결승전 1세트에는 바텀 전투에 빠르게 합류해 DRX 바텀 듀오를 처치했다. 5일 결승전 3세트에서도 비슷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헤카림을 선택한 그는 샌드박스 진영 깊숙한 곳으로 순간이동했다. 다그닥 다그닥 달려 곧 더블 킬을 얻어갔다. 게임의 분기점이었다.

일반적으로 탑라이너들은 경기 초반의 순간이동을 라인 복귀에 활용하곤 한다. 크립 스코어(CS) 손실이 곧 라인전 열세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이번 대회에서 김기인은 빼어난 라인전 능력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미니언 웨이브를 밀어 넣고, 이를 통해 CS 손실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아낀 순간이동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협곡 전역에 행사했다.

김기인은 대회 우승 직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게임을 조금 넓게 보고 싶었다”고 순간이동을 아낀 이유를 설명했다. 아울러 “선수마다 (순간이동 활용의) 성향이 다르다”며 “상황이 좋아 보여 바텀에 순간이동했는데 경기가 잘 풀렸다”고 덧붙였다. 이제 아프리카와 맞붙는 팀들은 같은 팀 탑라이너의 순간이동 콜을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어졌다.

라인을 밀어 넣으면 순간이동을 안 써도 된다. 말은 쉽지만 이를 해내는 선수는 적다. 탑라이너의 기본 소양은 맞수를 거세게 밀어붙여 상대 정글러를 호출하되, 갱킹에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공격적 성향의 탑라이너 대다수가 ‘더샤이’ 강승록(IG)을 롤 모델로 지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 이 분야 절대 강자로 꼽힌다.

KeSPA컵에서 김기인은 상대 정글러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탑라이너였다. 그는 13세트 동안 72킬 22데스 8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라인전에서 상대 갱킹에 사망한 건 그중 6회에 불과했다. 집요하게 탑을 노렸던 브리온 블레이드가 3번 유효 갱킹을 만들었고, 한화생명e스포츠가 기습적인 4인 다이브로 1번 갱킹에 성공했다. DRX와 샌드박스도 1번씩 득점했다.

김기인이 높은 갱킹 생존률은 ‘스피릿’ 이다윤의 예리한 감각과도 연관 있어 보인다. 김기인은 KeSPA컵 우승 직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갱킹은) 정글러와 함께 소통하면서 플레이하면 자연스럽게 피해진다”고 말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수능 만점자 같은 어투였다.

이다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빼어난 갱킹 실력을 뽐냈다. 자신이 출전한 10세트 모두 퍼스트 블러드에 관여했다. 이다윤은 갱킹을 성공시켜야 하는 자, 김기인은 갱킹을 흘려야 하는 자다. 둘 다 갱킹 냄새를 기막히게 맡으니 시너지 효과가 나왔다.

다른 라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도인비’ 김태상과 불사조 군단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키워드도 로밍이었다. 그 두 글자는 지난해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팀들이 ‘캡스’ 라스무스 빈테르와 G2 e스포츠에 맞서는 데 애를 먹었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김기인이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옛 경기 영상을 보는 건 그의 평소 취미 중 하나다. 지난해에는 한 해외 팀의 공격적 스타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해가 바뀐 지금 밝히자면 그 팀의 이름은 로열 네버 기브업(RNG)이었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더불어 그는 지난 5월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팀이 이득을 보는 플레이를 하고 싶다”고 플레이 지향점을 밝힌 바 있다. 이번 KeSPA컵에서 선보인 색다른 움직임들은 지난 학습과 고뇌의 산물이었을 확률이 높다.

김기인은 앞으로 약 3년간 아프리카 소속이다. 아프리카는 김기인을 사로잡기 위해 LCK 역대 최고 수준의 대우(‘페이커’ 이상혁 제외)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김기인보다 늦게 사인한 주요 자유계약(FA) 선수들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오버 페이이고 과한 정성이었을까. 유행가 가사를 빌리자면 아프리카가 그 금액에 김기인을 붙잡은 건 ‘올해 제일 잘한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혹자는 “김기인이 아프리카 같은 팀에 남은 게 아쉽다”고도 하지만, 김기인은 ‘아프리카 같은 팀’의 뜻을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우승 후보’로 바꿀 만한 재능이 있다. 3년이면 차고 넘친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