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세청, 대법원 판결 앞세워 한진가(家)와 법리 공방

입력 2020-01-06 18:36

조중훈 전 한진그룹 명예회장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 관련 상속세 부과를 놓고 범 한진가(家) 2세들과 과세 당국 간 법적 다툼이 1년6개월간 진행돼온 사실이 국민일보 취재(6일자 1·2면)로 드러나면서 누가 이길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은 이달 중 결과를 내놓을 전망이다.

6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세청은 ‘소극적인 미신고도 탈세를 위한 부정행위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 등을 근거로 한진가 상속인들에게 거액의 상속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진가 상속인 5명은 조 전 명예회장의 스위스 비밀계좌 등 해외 상속분에 대한 상속세 부과가 부당하다는 취지로 2018년 7월 조세심판원에 심판을 신청했다. 이들은 국세청 주장과 달리 ‘단순 신고 누락’이어서 부정행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반면 국세청은 ‘외관상 드러나지 않는 것을 신고하지 않았다면 부정한 행위에 해당된다’는 1990년 5월 대법원 판결을 앞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법원은 싱가포르에서 선박 ‘대봉1호’의 엔진을 수리했다는 내용의 쪽지를 선장으로부터 건네받고도 당국에 관련 신고를 하지 않아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선주 A씨의 행동이 부정한 행위에 해당된다고 판시했다. 외국에서 선박 등을 수리한 경우 이에 사용된 물품에 세금이 부과되는데, A씨가 이를 내지 않기 인해 고의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윤관 대법관 등은 “외관상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신고가 없으면 그에 대한 관세의 부과·징수는 현저히 곤란하다”며 “수리 사실을 보고받고도 위 쪽지를 찢어버리고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사회통념상 부정한 행위를 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국세청은 이런 법리를 한진가 건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스위스 비밀계좌도 선박 엔진 수리 여부처럼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데다 비밀계좌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행위가 A씨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한진가 측이 조 전 명예회장 사망 전에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상속세를 내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018년 4월 국세청은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사전 인출된 5000만 달러(약 580억원)와 예치금, 프랑스 파리 부동산 등에 대한 상속세·가산세로 852억원을 부과했다. 조세심판원이 국세청의 손을 들어준다면 한진가 상속인들은 약 660억원(부과된 852억에서 이미 납부한 192억을 뺀 금액)을 내야 한다. 조세심판원이 반대로 한진가의 손을 들어준다면, 즉 조 전 명예회장 사망 전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인출된 5000만 달러에 대해 상속세 납부 의무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엔 상속인들이 내야 할 상속세는 300억원대로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들은 해외 비밀계좌를 이용한 자산 은닉 및 세금포탈 행위를 엄격히 처벌하고 있다. 미국 법원은 스위스 비밀계좌를 이용해 수백만 달러의 재산을 은닉한 자국민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바 있다. 독일 과세 당국은 유럽의 대표적인 조세피난처인 리히텐슈타인 국영은행 LGT에 자금을 맡긴 부호 600여명에게 1억8000만 유로(약 2350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